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쉐프로듀서 Nov 29. 2019

'버리는 것'에서 '명품'으로

현대정공 갤로퍼-버리는 것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귀중한 재료가 되었다

대SUV시대

우리는 참 신기한 시대를 살고 있다.

4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이카 시대'를 외치면서 그저 자동차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자동차의 성능과 외관을 점점 신경 쓰더니, 티코를 기점으로 세컨드카 시대가 열렸고,

이제는 자동차를 그저 운송수단이 아닌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서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의 SUV 라인업은 그야말로 모둠 뷔페나 다름없다

소형 SUV인 '베뉴'에서부터 대형 SUV인 '팰리세이드'까지, 

요즘 현대자동차의 SUV 라인업은 그야말로 모둠 뷔페다

현대자동차뿐이겠는가, 기아와 쌍용 그리고 르노삼성까지 입맛대로 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SUV들이 넘쳐난다.


이젠 험로를 달려야 하거나, 생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4륜 구동을 구매하는 시대가 아니다.


자신의 패션에 맞는 시계를 고르듯,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SUV를 고를 수 있는 

대SUV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필자는 늘 한국의 자동차 문화가 타 국가에 비해 뒤쳐져 있다고 불평하지만

SUV문화 하나만큼은 한국이 선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SUV라는 카테고리를 180도 뒤집어놓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니깐 말이다.

기아 스포티지(좌)에서 시작된 도심형SUV컨셉은 도요타RAV4(중간)와 혼다CR-V(우)를 만들어냈다.

과거, SUV는 마초스러움이 넘치는 오프로드의 상징이었다.


도심이라는 이미지와는 한참 동떨어진 험지에서 사납게 흙을 튀기며 질주하는 SUV의 고정된 이미지는 1991년 도쿄 모터쇼에서 아담한 사이즈와 매끈한 디자인과 세단 같은 인테리어로 첫 선을 보인 기아의 스포티지의 등장으로 인해 한방에 깨지는데, 바야흐로 '도심형 SUV 시대'의 서막이었다.


이후 도요타의 RAV4, 혼다의 CR-V, 포드의 이스케이프가 뒤늦게 출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도심형 SUV 열풍이 불었고, 변방의 메이커던 기아는 스포티지를 통해 한국의 자동차를 세계에 각인시킬 수 있었다.


파란장만한 세월을 지내다 세계 최고가 된 한국 SUV의 뿌리는 어땠을까.


SUV 시대가 열리다

'한국 SUV의 뿌리'는 늘 자동차 마니아들에게 콜로세움과도 같은 주제이다


쌍용의 코란도가 한국 SUV의 시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코란도는 SUV보단 군용 지프의 연장선에 가까웠기 때문에 현대적인 SUV와는 거리가 꽤나 멀었고

당시에 판매되던 코란도는 일상생활에서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량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1991년 출시된 현대정공의 갤로퍼

진정한 한국의 SUV 시대는 1991년 현대정공의 갤로퍼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1980년대 모토캠핑 열풍을 일으킨 '봉고'

1980년대 중후반,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한국은 조금씩 레저 붐이 일게 된다.


특히나 기아 봉고로 인해 유틸리티 차량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어난 모토캠핑 열풍으로 한국은 조금씩 자동차를 이용한 문화생활에 눈뜨게 된다.


현대정공(지금의 현대모비스) 역시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읽고 SUV 개발을 생각하게 되는데, 계열사였던 현대자동차가 SUV 시장에 뛰어들 생각이 없어 보이자 현대정공은 SUV 시장에 출사표를 던질 준비를 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현대정공은 M-CAR라는 프로젝트명으로 현대자동차의 엔진과 국산부품을 이용해 시제품을 만들었으나

미국에서 진행한 성능 테스트의 결과는 대실패였다.


높은 SUV 개발 난이도의 벽에 부딪힌 현대정공은 정공법보다는 조금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한다.

1982년 출시된 1세대'미쯔비시 파제로'

1970년대, 1952년부터 미국 JEEP사의 CJ-3A를 위탁 생산하던 미쯔비시는 기존의 군용 지프보다 승차감과 거주성이 개선된 SUV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SUV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1982년, 지금도 미쯔비시의 최고의 명차로 꼽히는 파제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정공의 계열사인 현대자동차는 미쯔비시와 오래전부터 기술교류로 사이가 깊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현대정공이 미쯔비시 파제로의 라이선스 생산을 제시했을 1989년 당시, 

이미 미쯔비시는 1세대 파제로의 성공으로 2세대 파제로를 준비하고 있었고

드디어 현대정공은 SUV 생산의 해답을 찾게 된다.


그렇게 1990년 미쯔비시는 별다른 요구 없이 1세대 파제로의 라이선스를 현대정공에게 넘기면서

드디어 1991년, 한국 SUV 역사의 조상님인 현대정공의 '갤로퍼'가 탄생한다.


호르몬과 갤로퍼

후쿠오카의 음식점 '구텐'의 모츠나베

도쿄나 오사카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규슈의 중심인 후쿠오카에 가면 명란젓만큼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이 있다.

바로 호르몬(내장)을 이용한 전골요리인 '모츠나베'다.


한국의 명란젓이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의 대표 식품이 된 것처럼,

모츠나베 역시 한국의 식문화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변화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내장을 이용한 요리는 다양하지만, 일본의 내장요리의 역사를 말할 때는 한국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00년대까지 일본에서 내장은 미식가들이나 가끔 찾는 식재료였지 

일반인들이 평범하게 먹는 식재료는 아니었다.

일본어로 식재료로써의 내장을 뜻하는 단어인 '호르몬'은 간사이 사투리로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내장은 말 그대로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과거부터 '쇠고기 좀 먹을 줄 아는 나라'라고 불리던 나라 아닌가.

도축장에서 버려지는 가축의 내장을 받아먹으며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식문화는

일본의 패전 이후 배고픔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에게 퍼지게 된다.


내장 같은 부산물은 줘도 안 먹던 일본인들에게, '버리는 것'으로 만든 음식은 생존을 위한 음식 그 자체였다.


이제는 일본인의 소울푸드가 되어버린 내장요리 '호르몬'

이후 재일 조선인이 많이 분포하던 규슈와 간사이에서만 퍼져있던 이 식문화는

1990년대 버블경제의 붕괴로 주머니가 가벼워진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며

점점 일본 전국으로 퍼지게 되고, '호르몬'은 일본의 대표 식재료로써 자리매김한다.

1세대 갤로퍼(좌)가 한국에 등장했을때 일본은 2세대 파제로(우)가 등장했다

현대정공이 1세대 파제로를 갤로퍼로 출시했을 때, 이미 미쯔비시는 새로운 2세대 파제로를 판매하고 있었다.

미쯔비시가 현대정공에 넘긴 1세대 파제로는 말 그대로 '호르몬'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버려진 것'이던 갤로퍼는 한국 SUV 역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다.

갤로퍼의 라이벌이던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좌)와 쌍용 코란도(우)

갤로퍼의 등장 전까지 한국의 SUV 시장을 지배하던 쌍용의 코란도는 갤로퍼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군용을 민수용으로 팔아 잔고장이 많았던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는 단종이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쌍용은 갤로퍼를 '일본에서 온 차'라고 비판하며 코란도를 한국 고유기술의 자동차라고 홍보했으나

프랑스의 푸조, 일본의 이스즈, 미국의 AMC의 기술력이 마치 짬뽕처럼 섞인 코란도가 갤로퍼를 비난하다니

지나가는 개가 코웃음 칠 일이었다.


갤로퍼로 인해 쌍용은 링의 구석까지 몰리며 위기에 처하지만, 

93년 무쏘를 등장시키며 SUV제작사의 명성을 지켜내고 갤로퍼를 상대로 본격적인 SUV 전쟁을 시작한다.

어찌 보면 갤로퍼 덕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쌍용이 한 단계 진화를 이뤄낸 셈이 아닐까.


이처럼 '버려진 것'이던 갤로퍼는 한국 SUV를 세계적인 레벨로 올려 준 시발점이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2019년 레드 닷 어워드를 수상한 현대자동차의 '팰리세이드'

갤로퍼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28년이 지났다.


갤로퍼-테라칸-베라크루스-맥스크루즈로 이어져온 현대자동차 SUV의 역사는

'명품'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팰리세이드로서 드디어 기나긴 노력의 결실을 맺었다.


미쯔비시가 처음 현대정공에게 1세대 파제로를 넘겼던 그날, 그 누가 이런 미래를 예상이나 했을까.

오히려 세계적인 명품이라 불리던 파제로는, 미쯔비시의 몰락과 함께 무너졌는데 말이다.


'버리는 것'을 식문화로 만들어냄으로써 후쿠오카의 명물이 된 모츠나베처럼

갤로퍼는 비록 버려진 파제로로 만들어졌지만, 그 이름만큼은 전혀 하찮지 않다.


현대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의 첫 SUV, GV80과 GV70의 출시가 눈앞이다.

GV80과 GV70의 성공을 위해, 오늘은 곱창전골에 소주 한잔 기울이며 갤로퍼를 사모한다.


-FIN-

글쓴이-쉐프로듀서

작가의 이전글 불패신화의 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