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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케데헌: 불완전함으로 완성되는 우리의 이야기

관계 속에서 깨어나는 인간의 서사

by 심리한스푼

1. 루미 이후, 우리에게 남은 것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서사는 루미의 개인적 각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IT IS.”는,

단지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에 대한 선언이었다.

루미의 싸움은 초자연적인 악귀와의 전투였지만,
그 실상은 자신이 부정해온 불완전함과의 대면이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 깊이 '공명共鳴'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양을 숨기려 애쓰던 루미의 모습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 너무도 비슷했다.


b11DYGgD0oHDJs0lW9HzbRAKliuxAcRHXPfxyV3G0M0abtYqrcAs3scclANmSMKd3sK6sx0i06TAgrtgi2O78A.jpg 문양을 숨기는 루미


어쩌면 우리는 늘 ‘보여지기 위한 완벽함’을 유지하느라,
자신의 불안, 분노, 두려움, 결핍을 감추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숨김 속에서 관계는 서서히 메말라갔고,
우리는 스스로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갔다.


루미가 그 문양을 드러냈을 때,
많은 이들이 속상해했다.
그 속상함은 단지 그녀를 위한 감정이 아니라,
“나도 저렇게 숨겨온 게 있었다.”는 공감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서사는 우리 각자의 서사였다.

그녀의 수용은 우리의 수용이었다.
그녀의 구원은 우리의 가능성이었다.



2. 완전함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완벽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시선, 스스로의 기준이 한 몸처럼 얽혀
하나의 ‘큰타자’를 만들었다.
그 타자는 말없이 속삭였다.

“흠이 있으면 안 돼.”
“넘어지면 약해 보여.”
“부족하면 사랑받지 못할 거야.”


그 결과 우리는 ‘완벽한 자아’를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완벽함은 결코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의 반대편에 세워진 환상일 뿐이다.


freud-in-30s-audio-and-video.jpg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간이 도덕적 완벽을 좇을수록,
오히려 초자아의 공격이 심해진다고 말했다.
초자아는 “이래야 한다”는 명령으로 자아를 옥죄며,
우리를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수치심 속에 가둔다.


이 심리적 구조는 루미의 ‘문양’과 닮아 있다.
그녀의 문양은 죄의 흔적이 아니라,

완벽함에 대한 저항이었다.
즉, 루미의 서사는 완전함의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이야기였다.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이 루미를 보며 위로받은 이유는,
그녀가 보여준 ‘드러냄의 용기’ 때문이다.
SNS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만,
그 화려한 배경 뒤에는
“나는 괜찮은 척하느라 너무 지쳤다”는 피로가 숨겨져 있다.


루미는 그 피로에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숨지 않겠다.”

그 선언은 우리 마음속의 작은 반란을 일으켰고,

그 순간 우리는 루미와 공명하며, 치유를 경험헀다.



3. 공명(Resonance)의 심리학: 혼자서는 치유될 수 없다

루미의 각성이 완성된 이유는,
그녀가 혼자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우, 미라, 조이, 바비—그 불완전한 이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무너짐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심리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이를 공명(Resonance)이라 부른다.
공명이란, 타인과 세계가 서로의 울림을 듣는 경험이다.
내가 말했을 때, 누군가의 마음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 떨림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낀다.


치유란, 바로 그 울림의 순간에 일어난다.
진우와 루미2.jpg 진우와 루미


루미가 진우와 마주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어둠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 진우는 귀마의 목소리를 잠시 들리지 않았다.

잠시나마 죄책감의 공격에서 자유로워 진 것이다.


“너의 어둠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이 말은 심리학적 의미에서 ‘공명의 언어’였다.

그 한 문장으로 루미의 내면은 무너짐이 아닌 재결합의 진동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관계적 치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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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도 이 공명의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상담 장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연인 관계에서도
진정한 치유는 지적 조언이 아니라,

‘감정의 울림’으로 이루어진다.


“너 힘들지?”
“응, 근데 네가 있어서 괜찮아.”

이 짧은 대화 안에
수많은 상담 이론보다 강력한 치유의 언어가 담겨 있다.


루미가 찾은 해답은 완벽한 자립이 아니라,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회복시키는 공명이었다.



4. 혼자 싸우지 않는 영웅: 현대적 영웅 서사의 탄생

조셉 캠벨은 영웅의 여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모험의 부름 → 시련 → 죽음과 부활 → 귀환.”


전통적 영웅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다.
그러나 루미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녀의 싸움은 타인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통합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루미는 새로운 형태의 영웅이 되었다 —
혼자 싸우지 않는 영웅, 즉 공명하는 인간.


미라 루미 조이.jpg 왼쪽부터 미라, 루미, 조이


이는 현대 심리학이 말하는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의 과정과 맞닿아 있다.
자기초월이란,

자기를 넘어서 타인과 세계로 확장되는 의식이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상처로 세상의 상처를 감싸는 것.
그것이 루미가 마지막에 보여준 태도였다.


그녀는 셀린의 시선을 이겨내며,
“이래야만 한다”는 명령으로부터 벗어났다.
진우는 귀마의 속삭임을 멈추며,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기처벌에서 해방되었다.


루미와 진우는 서로의 불완전함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완성을 만들어냈다.
루미와 진우.png


현대의 영웅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함께 울며 성장하는 존재다.



5. 불완전함으로 완성되는 우리

《케데헌》의 마지막 장면,

헌트릭스의 재결합은 단순한 팀의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통합’이자 ‘단절된 관계의 회복’이다.
루미가 말했던 “혼문(魂門)”은,

이제 루미 개인의 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이 된다.


새로운 혼문은 완벽한 자들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상처받은 자들이 서로를 비추며 나아가는 길이다.


불완전함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는 틈이다.
빛은 언제나 금이 간 곳으로 들어오고,
사람의 마음도 그 틈에서 서로를 느낀다.


우리는 루미처럼 완벽해지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살아간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큰 용기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툰 채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루미의 마지막 선언이 울린다.

“IT IS.”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선언.

이 한 문장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결함투성이이며, 때로는 외롭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의 혼문을 열고,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 아닐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와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영화다.



6. 나아가며: 케데헌은 우리의 이야기다.

루미의 여정은 결국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였다.
그녀의 싸움은 내면의 어둠과의 전투였고,
그 어둠을 껴안는 순간 그녀는 인간으로 완성되었다.


치유는 혼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을 통해 완성된다.


완전함은 신의 영역이라면,
불완전함은 인간의 존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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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이후, 우리는 각자의 혼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묻는다.

“나는 나를 받아들였는가?”
“나는 타인의 결함 속에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루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한줄요약

"우리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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