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
오늘 점심으로는 남편이 청둥호박으로 만들어준 죽을 먹었다. 호박을 썰고 물을 붓고, 은근한 불에 끓이는 남편을 상상하니 단순한 호박죽이 아니었다. 나는 약속이 없는 날이면 도시락을
챙긴다. 주로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를 위주로 하고 간식거리로 고구마나 감자를 쪄서 넣기도 한다.
회사 구내식당의 풍경은 늘 정해진 각본처럼 흘러간다. 11시 50분이면 벌써 줄을 서는 사람들, 12시 정각이면 우르르 몰려나오는 직원들, 그리고 어느 정도 사람이 빠지면 느긋하게 나타나는 사람들. 나는 먹는 시간보다 보다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으면 시간이 아까웠다.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시간에 쫓기듯 먹는 것이 싫었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식사가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바쁘게 일하다가 유일하게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시간이 유쾌하고 좋았다. 하지만 속도가 문제였다. 누군가는 허겁지겁 먹고, 누군가는 천천히 먹느라 밥을 남기고, 결국 속이 불편한 채로 오후를 시작하곤 했다.
직장생활에서 점심시간은 단순한 식사 시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업무의 긴장에서 잠시 벗어나 동료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고, 오전과 오후를 이어주는 틈새 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중의 활력을 재충전하는 필수적인 휴식의 시간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혼밥러"라는 말이 낯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조용한 창가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여유, 점심을 일찍 먹고 사무실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자유로움이 좋아졌다. 때로는 근처 서점에 들러 잡지를 훑어보기도 하고, 날이 좋으면 커피 한잔 들고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그러던 오늘,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00님이 함께 점심 먹자고 하시는데 언제 시간이 가능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당연히 시간을 내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정중히 거절했다. 시간을 내면 되는데, 한 끼 식사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왜 굳이 불편한 자리를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 의미 없이 오가는 대화, 형식적인 어색한 침묵을 상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같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그런 자리 대신, 내가 여기 오기까지 만난 고마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내 방식대로 감사를 전하고자 마음먹었다. 살아가면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존재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감사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할 생각이다.
상하 수직적 위계질서가 마치 굳건한 이곳에서, 이런 거절은 쉬운 것은 아니다. 예전의 나였
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문득 '진작 이렇게 살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상사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맞추느라 내 감정은 뒷전이었다.
이제는 나를 돌보는 일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때 타인과의 관계도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호박죽처럼, 나의 마음도 조금씩 데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