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
꿈을 꾸었다. 꽤 오랜 시간 꿈을 꾼 것 같지만, 기억에 남는 건 낯선 거리를 헤매던 모습뿐이다. 밤새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바람 때문에 잠을 설쳤는지, 아니면 잠이 얕아 바람 소리가 들렸던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눈 치우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뒤섞인 아침, 고요한 시간이 깨졌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눈도 많이 왔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도로와 학교 근처에서는 커다란 차들이 분주하게 눈을 치우고 있었다.
아침은 따뜻한 국물이 있는 라면을 먹기로 했다. 당번이 정하는 대로 먹는다는 생각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성탕면이었는데,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해외용 라면은 따로 만드는 걸까 싶을 정도로 밋밋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라면과 겉절이로 아침을 마친 후, 아이는 눈을 치우러 나갔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친 후,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간간이 차고 앞 눈을 치우는 사람만 보일 뿐,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거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생겼다. 집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거실 창문 앞에 놓인 소파가 그 자리가 되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 오후도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반드시 고독한 시간을 확보하라. 옷장 안, 사무실 구석, 동네 도서관 뒤쪽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야 할 수도 있다. 정적의 시간을 일정 분량 섭취하지 못하면 어느 수준 이상의 앎에 도달할 수 없다. 일정 시간 홀로 고립되어야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이 쓰는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다. “
그 문장을 곱씹으며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곳에서, 비록 석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늘어지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의미를 찾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길게 늘어지고, 정적만이 흐르는 이곳에서는 특별히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여기에 있을 뿐이다. 판단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보기로 했다. 고요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가면 다시 이전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이곳에서 내가 무엇에 용기를 내고 행동해야 할지를 알게 되길 바란다.
방에만 있던 아이가 오늘은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며 컴퓨터로 작업한 결과물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배경으로 숏폼 패션 잡지를 만들었는데, 소재와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음악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영상인데, 영상에 음악을 묻힐까 염려했더니, "일단 해보고 싶은 거라서 시작해 보는 거예요"라며 웃었다. 아이만의 특징은 바로 그 시작의 용기였다. 생각나면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 그것이 아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설날, 집에 전화를 걸어 새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처음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시간이었기에, 남편은 혼자서 어떤 시간을 즐기고 있을지, 아니면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혼자 있으니 심심하다고 했지만,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염려는 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다시 눈이 내렸다. 여기저기서 이미 눈을 치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는 내일 한꺼번에 치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