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이 쏴, 바람이 휙’이라는 그림책이 떠올랐다. 사실 그 책은 바람보다 우리나라 ‘혹부리영감’ 동화의 해외 버전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어제와 오늘, 바람이 그보다 훨씬 강하게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계속 생각났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을 따라 휘청거린다.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 떠올랐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도, 흔들리지 않는 삶도 없다.
오늘은 어영부영 보낸 하루였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버렸다. 잠에서 깨면, 보통은 만족감이 느껴져야 할 텐데, 나는 그 대신 억울함이 앞선다. 잠에 대한 터부가 있는 것 같다. 잠든 동안의 나를 게으르다고 자책하게 된다. 몸이 원하는 잠을 자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왜 이렇게 나를 몰아세우는 걸까? 아마도 그건 내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 후회 없는 시간을 만들고 싶은 강박이 나를 괴롭히는 듯하다.
만약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이 그날의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고,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인생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라면? 하루살이처럼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늘부터 3일간 아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외출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혼자라도 다녀와야지.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인디고 서점이었다. 천천히 둘러보며, 그곳에서 예쁜 식물 그림이 그려진 공책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를 보며, 결국 나갈 용기를 잃어버렸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바람 탓을 해야 마음이 편해지겠지. 나의 어영부영을 나무에게 떠넘기다니, 참 비겁하다.
어영부영 보낸 하루를 바람 탓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설명절 생각이 났다. 지금,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설 연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명절이다. 아마 지금쯤 명절 준비로 장보기에 한창 바쁠 시간이겠지. 그런데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게 낯설다, 내일 설날에는 영상통화로나마 새해 인사를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