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록

D-9

by 리베르테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 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그 친구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바꾸어놓았으냐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 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이병률 산문,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유난히 공감되는 문장이라 옮겨본다.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에 빠져들고,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지 모른다.



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이른 새벽 4시.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주말, 교회에 가는 날이다. 매일 아이와 둘이서만 지내다가 일주일에 하루, 낯설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는 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일찍 예배를 보고, 식당에서 식사 준비하시는 일을 도왔다. 쇠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무생채를 그릇에 담고 뒷정리를 하면서, 많은 일은 아니었지만 나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낯선 마음이 들지 않게 배려해 주시는 덕분에 마치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것처럼 편안했다.

3개월만 있으면 떠날 사람인데, 그저 지나가는 행인이라 생각할 법도 한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친절했다. 과분한 친절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한 권사님께서 팀 홀튼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며 차를 태워주셨다. 매장 안은 넓지 않았지만, 창가에 연말 분위기를 담은 이쁘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예뻤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매장 안이 손님들로 가득 차 얼굴이 나올 것 같아 포기했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니 마음이 환기되는 듯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권사님은 유니님과 20세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아끼는 베스트프렌드라 하셨다. 두 분의 우정이 부러웠다. 50년 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며 한 권의 책을 읽는 듯했다. 문득 깨달았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라는 것을.


저녁을 준비하는데 점심에 무생채를 먹어서인지 김치가 생각났다. 아이도 냉장고에 배추를 보더니 김치를 만들어 먹자고 했다. 간단히 겉절이를 만들었는데, 뭔가 2% 부족한 맛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김치!’ 맛있게 먹자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억지다.


"엄마의 실력 발휘가 잘 안 되시는데요"라며 아이가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아이의 요리 솜씨가 나보다 좋은 것 같다. 아이는 내일 아침에 가지를 이용한 비건 요리, 가지 라자냐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가지로 만드는 라자냐라니,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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