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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Aug 23. 2022

우영우 변호사가 소환한 어느 날의 제주도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

삶이 시디신 레몬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처럼 신산할 때가 있다. 의도하지 않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이 '신산함'의 다른 이름이 '외로움' 이란 걸, 일을 그만두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그야말로 문득 깨닫게 되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어깨가 절로 동그랗게 말리는 12월 즈음, 짧은 겨울 해를 받기 위해 거실 소파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툭, 하고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뭐지? 왜 눈물이 나지? '라고 채 깨닫기도 전에 한 방울의 눈물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통곡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가장 큰 울음이자 전례 없던 '대성통곡'이었다.


꽤 오랜 기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해 오면서 더 이상 나로부터 길어 올릴 그 어떤 물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둬야겠단 결심을 했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내 실행으로 옮겨버렸다. 결단의 순간, 당시 함께 프로그램을 이끌던 담당 프로듀서는 눈꼬리를 한껏 내린 불쌍한 얼굴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작가님 출근 안 하셔도 되고, 원고만 보내 주셔도 된다니까요! 자녀분도 대학에 입학 잘~했고, 작가님 주변에 별로 신경 쓸 일도 없으신데, 왜 일을 그만두려고 하세요? 일 하시던 분이 안 하면 병난다고 하던데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능력은 둘째치고 경력이 이만한 작가를 당장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엄청나게 사회적 지위가 있거나 남부러워할 만한 보수를 벌어 들이는 직업은 아니나 프리랜서로 살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의 감성을 이어갈 수 있는 작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 내게도 그리 유쾌한 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바로 그 순간,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는 숨을 쉴 수 없는 진공의 공간에 영원히 갇힐 것 같았기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에~이 뭐 새로운 작가랑 일하면 좋아할 거면서.. 사람은 떠날 때를 알고 떠나야 뒷모습도 아름다운 법이라고요! 그러니 나 말리지 마요. 더 이상"


사실 경력단절의 기간을 제외하고라도 20년 이상을 하나의 일에 정진해온 터라, 섭섭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어떤 회유와 압박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리라 결심했기에 말을 뱉은 후 정들었던 스튜디오를 나서기까지 놀라우리만치 거침이 없었다. '떠나는 것이 이리 쉬울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떠날걸, ' 이란 마음마저 생겨날 만큼.



그때가 11월로 막 접어든 가을 개편 시즌이었고, 이후로 어찌어찌해서 다른 지역의 음악 방송을 울며 겨자 먹기로 1년쯤 더 한 뒤(그 굳은 결심이 누군가에 의해 와르르 무너져) 마침내 애증으로 뒤범벅된 방송가를 떠나게 됐다. 삶의 신산함과 외로움의 등가 관계를 깨달은 건 그로부터 또 몇 개월이 흐른 시점이었던 거 같다. 왠지 일을 그만두자마자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어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원고로 쓴 게 틀림없어!' 라며 이제는 그냥 무작정 쉬어보자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가던 날들이어서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창밖엔 겨울 햇살이 찬란한데 이상하게 공허한 것이다. 그것도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아주 지독한 공허함이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인지 대성통곡을 하면서도 리모컨을 찾아 음악을 틀었다. 음악이라도 없으면 껍데기만 남은 몸이 산산이 부서져 공기 중으로 흩어질 것만 같은 조급함이 숨통을 옥죄어 왔기 때문이다. 흐르는 음악을 따라 신산함이 외로움으로 그리고 공허함은 공포로 급격히 바뀌어갔고 내 몸과 마음은 먼지가 돼 공중을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시간 속에서 익숙한, 그리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고요한 노랫말이 분절을 일으키며 한 음절씩 공간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신중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냥 선명하게 다가오는 노랫말, '제주도의 푸른 밤'이었다.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신문에 T 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하늘 아래로

떠나요 둘이서 힘들게 별로 없어요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 찍기 구경하며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 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 /제주도의 푸른 밤, 가사



사실 우리 가요 중 이 노래만큼 다양한 가수의 목소리로 리메이크된 노래도 그리 많이 없을 것이다. 그날 공간을 울리며 선명하게 다가왔던 '제주도의 푸른 밤' 은 성시경 버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로 부른 최성원의 오리지널 곡을 더 좋아한다. 그가 부산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 안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던가, 오래전 그 시절의 낭만이 고스란히 담긴 노랫말과 무심한 듯 그렇지 않은 듯, 음률에 목소리를 적시며 낭송의 느낌으로 부르는 목소리에 아마도 반했던 듯 싶다.


정말로 외롭다고 느낀 그 순간에 노래는 모든 걸 버리고 아니, 모든 걸 뒤로하고 일단 떠나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외로우면 떠나야 하는 거라고, 그것도 제주도로 떠나야 하는 거라고' 자꾸만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떠나야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유의 기운을 맞기 위해, 뭍 별이 푸른 밤을 수놓는 그 제주의 며칠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제주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물론 떠나면서도 제주가 나의 신산함과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때는 주위를 둘러싼 모든 어지러운 것들을 그저 훌훌 벗어버리고 싶었음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와 예의 일상에 몸을 내맡긴 채 하~ 세월을 보내고 중이다. 다만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제주도 에피소드' 중, 배우 박은빈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제주도의 푸른 밤' 이 그 시절의 낯선 내 모습을 소환해 와서 화들짝, 놀라긴 했다. 이미 많은 가수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나왔지만 발음이 명징한 배우의 아카펠라 버전으로 듣는 노래는, 아무런 제약이나 망설임 없이 감행했던 몇 년 전의 그 제주도행이 불러온 긍정적 나비효과를 다시 가슴에 각인시켜주었다. 고맙게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퀘 렌시아' 이자, '이상향'인 곳이 바로 제주도라는 걸 한참 잊고 살았었는데, 드라마의 ost뒤로 넘실대는 제주도의 여름 바다가 다시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하여,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일까지 그만뒀으면서 나는 지금 그 결심을 제대로 이행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았다. 마이너적 삶을 수긍하면서도 메이저를 넘보며 경계에서 서성였던 오래 전의 시간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은 피폐해져 갈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쉬 떠나지 못했던 시간들을 아주 잠시지만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기도 했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마알간 모습을 한 배우는 자꾸만 '떠나요 제주도,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이라 권고한다. 노래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적요한 항구에 정박해 '닻'을 내리고 있는데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한 내 안의 무엇은 '돛'을 펴지 못하며 갈팡질팡 주저함이니, 이를 어찌할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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