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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02. 2023

삶을 구원한 생애 첫 '내 돈, 내 산' LP

이문세 '깊은 밤을 날아서'

"혜원아, 너 예전에 모았던 LP들 아직 갖고 있니?"


창밖이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는 초저녁, 멀리 있는 오라버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막 꽃망울을 맺은 봄 나무처럼 한껏 물이 올라 있었다.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좋은 일이 있음을 짐작케 한 목소리였다.


"아이고... 이를 우째요, 그 귀중한 LP들이 제가 관리를 잘 못해가지고 이사 오기 전에 다 휘어버렸지 뭐예요! 저도 아까워 죽겠어요"


"거, 참 아깝네 네가 가진 LP들 중에 지금은 쉬 구할 수 없는 명반들도 많은데.. 오빠가 거금을 들여서 이번에 LP플레이어를 하나 마련했거든.. 그래서 그 음반들 있으면 나한테 넘기라고 그럴랬는데.."


오라버니의 말투에서 진심으로 아쉬움이 묻어났다. 처음의 들뜬 목소리와는 달리 점점 풀이 죽어가는 말끝에 왠지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내 오라버니는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자신의 동생이 그토록 아끼고 아끼던 음반들을 잘 보관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도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LP로 들어본 적이 언제인가 너무 까마득해 다른 결의 미안함이 심장 한 쪽으로 피어올랐다.


'이러고도 내가 수십 년간 음악방송작가로 산 사람 맞아?'


그건 직업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닌, 한때 음악을 일상의 전부로 두고 있던 내 청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오라버니가 궁금해했던, 그래서 동생이지만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내게서 구입하고자 했던 LP들 중엔 사회로 나와 첫 월급을 받아 산 앨범도 있었는데, 내 음악적 식견은  그 앨범을 사기 전과 후로 나뉘었음이다. 물론 이전에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음악을 좋아하는 오라버니나 친구들과 함께 '음악다방'을 찾아 음악이 주는 위안에 깃들곤 했지만 내가 번 돈으로 처음 산 LP가 내 삶에 던진 구원의 밧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운이 좋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금융기관에 취업이 됐었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발을 들이던 그 순간부터 공간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공기와 똑같은 제복을 입고 움직이던 사람들의 다소 굳은 표정에 기가 죽어버렸던 거 같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연수에서 툭, 툭 튀어나오던 전문용어들의 생경함은 뇌에 흡수되지 못한 채 자꾸만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눈앞에 놓인 산더미 같은 현금다발은 거대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당시 금융기관들에도 현금을 세는 기계는 있었지만,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100만 원 정도의 돈뭉치는 고객 앞에서 멋지게 손가락으로 겨가며 세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과 전혀 새로운 경험들의 연속은 막 사회로 발을 들인 내게는  넘지 못할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게 연수가 이어지던 어느 날, 신입사원 연수를 담당하고 있던 계장님이 전에 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우릴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가.


"음.. 여러분 그동안 연수받는다고 수고했어요. 오늘이 월급날이라는 거 몰랐죠? 각자 통장으로 들어온 월급 확인해 보시고, 거 첫 월급으로는 부모님들 붉은색 속옷 사드려야 됩니다. 잊지 마시고.."


뭐라고 그 이후에도 말이 제법 오래 이어진 거 같은데, 솔직히 나는 그때 '붉은색 속옷' 보다 '월급'이라는 한 단어에 귀가 번쩍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회사에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지난 연수 기간을 보상해 주는 달콤한 당근!, 머릿속으로 빠르게 사야 할 물품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식구들 선물 하나씩 사고, 봄 옷도 한 벌 사고.. 아, 얼마 전에 들렀던 레코드 가게에도 가야지.. 돈이 없어서 못 샀던 앨범도 사야겠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용돈조차 내가 벌거나 장학금을 받아 충당해야 했던 시절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흘렀다. 사회에 나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처음 받은 돈을 가치 있게 쓰고 싶어 달려간 레코드 가게였다. 다행히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가풍 덕분에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레코드 플레이어'는 집에 구비하고 있었기에 내 돈으로 그토록 사고 싶던 새 앨범을 사서 밤이 새도록 듣고 또 들었다. 1987년 내 생일이 머지 않은 봄날의 어느 하루였다.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어린애들 놀이 같아

슬픈 동화 속에

구름 타고 멀리 나는

작은 요정들의 슬픈 이야기처럼

그러나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난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바보 같은 꿈 꾸며

이룰 수 없는 저 꿈의 나라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

그러나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그러나 우리들

날지도 못하고 울지만

사랑은 아름다운 꿈결처럼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

난 오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에

밤하늘을 날아서

그대 잠든 모습 바라보다가

입 맞추고 날아오고파(반복)'이문세/깊은 밤을 날아서 가사


그 무렵 발매돼 막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던 이문세 4집이었다.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을 고 이영훈이 작사 작곡했으며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반으로 알려진 바로 그 앨범 말이다. A 사이드의 '사랑이 지나가면' 에서부터 시작해, B사이드의 '그녀의 웃음소리뿐'까지 9곡 모두가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중에서 특히 '깊은 밤을 날아서'는 나를 매료시켰었다.


연애에 진저리가 나던 시절을 막 지나온 때문일까, 아니면 내 적성에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회사를 단지 가정경제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책임으로 다니고 있던 K장녀의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고운 그대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서 궁전으로 갈 수도 있어'라는 가사는 마치 가수 이문세가 내 삶을 구원하러 온 사람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나는 이 B사이드의  첫 번째 곡인 '깊은 밤을 날아서'가 동화처럼 펼쳐 낸 양탄자를 타고 그 온전한 봄밤의 시간을 노래에 빠져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4집과 이어지는 5집에서의 이문세 목소리는 너무나 감미롭고 불가항력적 이었기에.


그 후로 몇 달 동안 식구들의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퇴근하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이 앨범을 LP플레이어에 걸어 놓고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 사는 일, 무엇보다 헤어지고 만나는 일 같은 건 '어린애들 놀이' 같다는 가사를 속속들이 이해하고도 더 슬픔에 젖어 살 텐가, 라는 각성이 어느 순간 생겨나게도 됐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연애의 끝도, 매일 한숨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서던 회사의 정문도 그저 엔딩정해진 이야기속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반복해 듣던 노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긍정의 주문을 걸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내 삶을 견고하게 비춰주던 소중한 앨범을 놓쳐버리다니, 그것도 간수를 잘 못해서..... 오라버니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잃어버린 LP 대신 구비해 놓은 CD나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놓은 디지털 음원으로 만족하고 말았을 것이다. LP든, CD든.. 혹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생되든.. 노래가 다 똑같지 뭐!라고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음악과 노래를 LP로 접한 그 감성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자주 재생된 음반이 가진 스크래치마저도 음악이나 노래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설득력이 LP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레트로' , 다시 'LP'가 젊은 세대를 열광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한 동안 생산되지 않았던 LP들이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시중에 다시 유통이 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있는 것처럼, 턴 테이블에 올려진 LP의 미세한 파열음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더 늦기 전에, 내 오래전 봄 밤을 뒤 흔들었던 그 앨범 '이문세 4집'을 찾아 서둘러 중고 레코드 가게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다.


*커버 이미지/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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