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처럼 여름이 한껏 이글거리는 눈빛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7월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거대 금융그룹에 몸을 담은 지 세 해쯤이 지난 무렵이기도 했고.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 그날 하루를 떠올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 내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당시 먼저 사회생활을 했던 선배들의 말을 빌리면 직장생활의 위기는 '1,3,5'와 같은 홀 수 해에 찾아온다고들 했었는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던지 딱 3년째로 접어든 그 해에 알 수 없는 통증이 발바닥으로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이어지고는 했다. 병증을 의사 앞에서도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이 통증은 불시에 찾아왔다또 제 마음대로 사라지곤 해서 일상을 두렵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엔 금융기관 특성상 하루 종일 틀어 놓은 에어컨 때문에 생긴 냉방병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다가, 그냥 가벼운 몸살 기운 같다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 들 때면 왠지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몸속 깊은 어디에선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사실 당시로서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단한 고임금의 직장을 다니면서 이런 병증은 좀 포시럽다는 말들을 주변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했다. 그 말들이 얼마나 비수가 돼 내 삶을 헤집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침에 눈을 떠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꽉 채워서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날도 허다했음을 그들은 몰랐음이리라.
출근길 버스 안에서 바라다보이는 창밖 풍경의 자유로움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특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사람들의 발걸음이 왠지 나의 그것과 달라 보이는 날이면 이런 부러움은 어김없이 눈물을 불러오곤 했었다.
방송국에서 작가로 생활하며, 음악방송 프로듀서에 도전해보겠다는 졸업 무렵의 결심은 집안 사정과 맞물려 용인되지 않았다. 물론 방송국 측의 배려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원고를 쓰는 N 잡러 생활을 얼마간 이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간곡한 바람과 집안 가정경제를 일부분 돌봐야 한다는 k장녀의 책임감은 어쩔 수 없이 원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이면서 고임금을 주는 직장으로 결국엔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처럼 삶에서 의도치 않은 길로 들어서며 아쉬움에 자주 뒤를 돌아보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시작된 직장생활은 두려움과 어려움의 무한반복이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공과는 무관한 금융업무는 매일 반복해도 매번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상업고등학교를 거의 수석으로 졸업해 창구 업무를 보는 직원들과, 대학에서 경영이나 경제를 전공해 PB활동을 척, 척 해내는 직원들 틈에서 내가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이나, 월급을 한참 상회하는 상여금이 지급되는 날, 봉투를 받아 들고 함빡 웃는 엄마의 모습은 회사 서랍 속 사직서를 자꾸만 잠들게 했다.
그렇게 꿈처럼, 꾸고 싶지 않았던 악몽처럼 3년이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버린 7월의 어느 퇴근 무렵이었다. 당시엔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출ㆍ 퇴근하는 동안 듣곤 했었는데, 저녁인데도 자신의 위세를 채 다 지우지 않은 태양의 존재감이 붉디붉은 저녁노을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고, 창밖에는 바삐 움직이는 숱한 사람들로 도시의 자화상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하루치의 분주함, 그 눅눅하고 습한 풍경을 뚫고 노래는 흘러나왔다.
열린 공간 속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동차와 석양에 비추인 사람들 어둠은 내려와 도시를 감싸고 나는 노래하네 눈을 떠 보면 회색 빛 빌딩 사이로 보이는 내 모습이 퍼붓는 소나기 세찬 바람 맞고 거리를 헤매이네 무거운 하늘 희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아스팔트 답답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네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가고 싶어 눈을 떠 보면 회색 빛 빌딩 사이로 보이는 내 모습이 퍼붓는 소나기 세찬 바람 맞고 거리를 헤매이네 무거운 하늘 희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아스팔트 답답한 도시를 떠나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네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가고 싶어 날아가는 새들 바라보며 나도 따라 날아가고 싶어 파란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나도 따라가고 싶어
변진섭 /새들처럼 가사
노래 가사는 정확하게 딱 그 순간의 내 마음과 내 모습을 명시하고 있는 듯했다. 분명하게 어딘가에 속해 있으나 부유하는 해초처럼 정착하지 못한 삶과, 매일 다가오는 묵직한 일상이 두려워 자꾸만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이렇게 쉽고도 분명한 노랫말로 표현하고 있나 싶었다. 격렬하거나 극적이지는 않지만 담담하고 다정하게 노래가 지닌 의미를 전달한 가수, 변진섭 덕분이었을까? 당시 자주 듣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난생처음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사람처럼 두근대던 심장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그 현란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었다.
한편으론 답답한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내게는 새들처럼 날개가 없기에 다시 주저앉아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했지만 뜨거운 석양을 가르며 나는 그 새들의 자유로움을 지켜볼 수 있어 어쩌면 이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또한 이런 삶도 생각하기에 따라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도 이르렀다. 당장 치료할 수 있는 병증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낀 순간부터 가슴 어딘가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무거운 돌멩이가 제자리를 찾아 자리 잡은 듯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제법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통증과 불면의 밤이 그날 이후 잦아들었음도 고백한다.
이렇게 노랫말 마다에는 강도는 다르겠지만 분명, 치유의 손길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기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꼭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다. 다만 이때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은 고맙고 은혜로운 순간을 모르고 지나치는 우를 범하거나, 오만한 마음가짐으로 외면하는 것일 게다. '노래가 뭐, 그냥 노래지!'라고 치부하는 이들에게는, 노래도 자신이 지닌 치유의 힘을 쉬 드러내지 않음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