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린혜원 Nov 25. 2022

수능 망친 아이를 일으킨 노래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

매년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어떤 이들에겐 인생엔 오로지 두 가지 길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輕重 의 차이만 있을 뿐,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성공', 혹은 '실패'. 이 단호하기 그지없는 갈림길 앞에 서서 수험생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전전긍긍, 또는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 머뭇거리기 마련이다. 물론 '대학입시'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로 쓰이는 '수능시험' 은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면 이렇게 가혹한 시험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하루의 평가로 인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맛보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세상이 여기서 끝을 맺을 것만 같은 시간도 지나와보면 그저 삶의 대지 여기저기에 솟아 있는 많고 많은 산들 중, 하나의 넘어야 했을 산이었을 뿐,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지는 못했다는 걸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어떤 노래는 주춤거리고 있을 시간에,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에 '나만의 길'을 찾아 걸어보라 얘기해준다.


이 세상 위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짧은 하루에 몇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다

때론 어려운 시련에 나의 갈 곳을 잃어 가고

내가 꿈꾸던 사랑도 언제나 같은 자리야

시계추처럼 흔들린 나의 어릴 적 소망들도

그렇게 돌아보지 마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

나에겐 가고 싶은 길이 있어

너무 힘들고 외로워도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황규영 '나는 문제없어' 가사


오직 이 노래만이 알려진 원 히트송 가수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는, 수능일이 끝나고 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신청곡으로 많이 들어오곤 하던 노래다. 수능일 전에도 수험생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이런저런 희망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를 띄워 달라는 청취자들이 많지만, 유독 이 노래만큼은 수능일이 끝나고 시험성적이 발표되기 전까지 사연과 함께 신청되곤 했었다. 그 사연들은 희한하게도 많이들 닮아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으로 정확히 귀결될 만큼.


"우리 아이가 이번 수능을 망친 거 같아요. 아이에게 괜찮다고, 다음 기회도 있다고 말해줬지만 스스로에게 실망이 컸던지 매일 울기만 하네요. 힘을 줄 수 있는 노래 신청해 봅니다."


사실 시험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어느 정도는 범위 내에서 점수가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는데, 유독 '수능시험' 만큼은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라 조금이라도 기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마치 더 이상의 기회는 없는 것처럼, 때로는 인생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음을 고백한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한 가지 목표만 보고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달려온 딸아이에게 '급 브레이크'를 건 것도 바로 '수능시험'이었다. 수능 바로 직전 모의고사 성적이 너무도 좋았기에 학교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본인 스스로도 '수능'에 대한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긴장한 탓인지 밤새 장이 꼬인 데다,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치른 시험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수능 당일까지 컨디션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몸과 정신의 엇갈린 반응을 제어할 힘이 안타깝게도 그 때의 우리에겐 없었다.


시험 이후 몇 주를 딸도 나도 '두문불출' 했던 거 같다. 세상으로 향한 문이 닫힌 것처럼, 다시는 희망이 오지도 않을 것처럼, 넋을 놓은 채 말 그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던 시간이었다. 아이의 시험 결과를 묻는 주변인들에게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던 날들 그 한가운데서 이 노래, '나는 문제없어'가 신청된 어느 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매년 수능 이후엔 늘 신청되던 곡이었는데, 이게 나의 사연과 맞물려 가슴으로 훅, 치고 들어오니 가사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문제없어'라는 단 한 문장이 주는 '희망의 알고리즘' 은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일시에 열게 만들었다.


'넘어지고 힘들어도 그건 연습일 뿐이라고.. 다음번엔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끝도 없이 메아리로 귓가에 와닿았다. '그래, 스러지는 건 다음에 더 잘 일어나기 위한 연습일 거야. 그러니 더 이상 눈물바람은 하지 말자'. 그날 저녁 아이에게도 결연한 눈빛과 함께 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말없이 노래를 듣고 있던 아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그 눈물은 어제의 눈물과는 다른 빛을 지니고 있었음이다. 한 없이 밝은 멜로디에 실린 더없이 희망에 찬 가사는 내내 들어왔던 백 마디의 위로보다 더 큰 위안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인생이란 녀석, 어찌 보면 굉장히 얄밉긴 하지만 '최선' 이 안 될 때를 대비해 몇 가지의 '차선'이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눈만 크게 뜨면 보이는 그 길들을 '실패'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때때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너무나 중요한 기로에서 만나는 시험이지만 이 시험하나 때문에 인생이 엉망으로 망가진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시련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서 '나는 문제없어'를 주문처럼 외우다 보면 분명 또 다른 길을 만나게 될 테니. 설혹 그 길이 원래 가고자 했던 길이 아니면 어떤가, 길은 결국 어디에선가 이어져 만나게 되므로 우린 그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이전 02화 꽃몸살이라구요?이 노래를 처방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