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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03. 2023

묵은지 삼겹찜과 함께하는 새 봄맞이

소식좌의 1식 일기, 다섯 번째

산사에 홍매화가 피었네, 제주엔 이미 노란 유채가 흐드러지네, 집 앞 벚꽃 망울이 곧 터질 듯이 맺혔네... 여기저기서 때 이른 봄소식이 들려오지만 아직 해가 지거나 달에라도 들라 치면 몸이 오싹해지는 것이 '봄은 왔으나, 아직은 완연한 봄이 아닌' 상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깊어진다고 하더니, 지난겨울의 얼굴이 워낙 서늘했던 탓인가 보다. 저마다 이렇게 일찍 봄을 마음에 들이려 애쓰는 걸 보니.


계절이 바뀌는 이 즈음엔 여기저기서 군내가 많이 나기 마련이다. 우선 겨우내 입었던 방한용 옷들과 두꺼운 이불들에서 시작해, 춥다고 정리를 미뤄뒀던 집안 구석구석에 쌓인 물건들을 거쳐 가을에 해뒀던 김장김치까지. 두 계절을 지나오며 시간의 더께를 입은 것들이 내뿜는 군내인 것이다.


적어도 며칠의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새 봄맞이를 위해 군내를 없애 나가야 하겠지만 다른 어떤 것들에 비해 김장김치가 뿜어내는 군내는 단 시간에 해결하기 어려움이다. 사실 김장을 하지 않은 지 몇 년이 되었다고는 해도 여기저기서 얻어온 김치가 많은 데다, 주로 혼자 식사를 하는 패턴 때문에 예전에 비해 김치를 소비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서 도대체 저 김장김치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나도 나름대로는 골머리를 앓는다.


'혼자 먹는다고 해서 대충 먹는다'는 생각은 나의 '1일 1식'의 습관에 위배되기 때문에 묵은지로도 꽤 괜찮은 한 끼 식사를 위한 요리를 해 내야 하는 임무가 내게 주어진다. 묵은지로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건, 묵은지양념을 툭, 툭 다 털어낸 다음, 물로 씻어 꼭지를 떼고 쌈을 싸 먹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절인 배추가 깊이 익었을 때 느껴지는 풍미로 인해 쌈장을 얹어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그리고 묵은지를 결대로 썬 다음, 들기름에 된장을 약간 넣어 볶아서 내장을 뺀 멸치에 물을 조금 둘러 뭉근히 졸이는 음식도 있다. 예전에 내 엄마가 잘해주시던 반찬인데, 이게 또 고향의 맛을 떠올리게 하는 은근한 매력이 있다. 묵은지를 한 번에 처리하기엔 김칫소를 넣은 만두가 제일이고. 이렇게 묵은지를 천덕꾸러기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정말 많은 음식이 존재하고 다양한 레시피들이 존재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그 많고 많은 '묵은지 활용음식' 들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단연 '묵은지 찜'이다. 우선은 멸치와 가쓰오부시, 그리고 마른 표고와 건 다시마를 혼합해 우려낸 육수와 통 삼겹 한 덩이, 약간의 들기름과 설탕만 있으면 이 요리가 쉽게 완성되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는 생각보다 풍부한 맛을 지녀 겨우내 잃었던 미각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묵은지 찜'을 알기 전에는 그저 돼지고기 전지를 뭉텅뭉텅 썰어 넣고 묵은지를 더해 김치찌개를 끓여 먹곤 했지만. 도시에서 유명하다는 '김치 찜' 식당에서 너무나 허접한 '묵은 지 찜'을 맛본 이후, 도전의식이 생겨났다. '아니, 이 정도의 맛으로 돈을 받는다고? 차라리 내가 하고 말겠다'는 마음 말이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맛있는 '묵은지 찜'의 필수요건은 두 말하면 잔소리, '제대로 된 묵은지' 다. 정성으로 버무려 시간과 함께 익은 '묵은지' 여야만 한다. 그래야 다른 것을 첨가하지 않아도 김치가 무르익었을 때 낼 수 있는 최고의 맛을 우리 입에 전할 수 있어서다. 김장을 내 손으로 담글 때는 '묵은지 찜'을 위한 김치선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담근 김치지만 진짜 맛있었고, 젓갈을 많이 쓰는 지역의 특성상 익어 갈수록 감칠맛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어 온 김치들이 고르게 그 맛을 재현해 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어쩌랴, 묵은 김치들을 더 이상 오래 남겨뒀다가는 나만 '봄맞이'를 못할지도 모르는 조바심에 그중 김치국물이 선홍빛에 가까운 김치 한 포기를 꺼내 들었다.


점심 한 끼 먹자고 그 번거롭고 귀찮은 '묵은지 김치찜'을 하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쉬워도 너무 쉬운 게 이 '묵은지 김치찜' 이므로. 널찍한 냄비에 김치 한 포기와 통 삼겹을 넣고, 들기름을 김치 위에 둘러 준 다음 육수를 부어 끓이면 된다. 이때 주의 할 것은 김치찌개보다 훨씬 더 물을 적게 잡아야 한다는 것과 뭉근하게 제법 오래 끓여 김치가 흐물흐물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거다. 물론 통삼겹도 속까지 익어야 하니 그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맛이고 뭐고 지레 허기에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 김치가 너무 시다 싶으면 설탕을 이파리 켜켜이 한 꼬집씩 넣어 미리 재워두는 것도 맛있는 김치찜을 위한 나름의 묘책이 될 것이다.


오늘의 '묵은지 김치찜' 엔 지난겨울 일상을 어지럽혔던 몇 가지 일들을 함께 버무려 넣었다. 김치찜이 반 정도 익었다 싶을 때 넣게 되는 어슷썰기 한 대파 그리고  마늘 한 스푼과 더불어.


묵은 것들을 정리해야만 새것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더하여 새 날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차츰 부풀어 오르게 된다. 이 맘 때쯤 묵은 김치를 이용해 이런저런 음식들을 함과 동시에 겨울을 이겨낸 고소하고 푸른 '봄동'으로 겉절이를 식탁에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들기름이 코팅된 김치를 쭉~찢어 알맞게 썬 통삼겹 한 조각을 싼다. 밥에 올려진 이 묵은 것들의 조화로운 향연으로 소식좌의 식탁이 최고의 만찬이 되는 기쁨, 이즈음에 꼭 누려야 할 행복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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