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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13. 2023

집 나간 입맛 소환 1등 공신

소식좌의 1식 일기 여섯 번째

지난겨울 집을 나갔던 입맛이 도대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며칠을 누룽지 끓인 것으로 연명하다 보니 목소리마저 작아져 "나 요즘 너무 입맛이 없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 자꾸 하소연만 늘어진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동네 동생이 눈을 흘기며 가시 돋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언니는 사시사철 입맛 좋을 때가 언제여요? 나는 입맛 없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정말 궁금하더라. 세상천지에 이렇게 먹을 게 많고, 맛있는 건 더 많은데"


맞는 말이다. 3월이 되니 냉이며 , 미나리등의 봄 나물이 시장에 싱그런 자태를 드러내고 꼬막이나 멍게 같은 제 철 해산물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한 눈에도 먹음직스러운 식재료들이 찬란한 봄볕을 받아 더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이즈음 봄인 것이다. 그런데 왜 내 입맛은 이런 황홀한 유혹에도 끄떡없이 굳건한 것일까.


따지고 보면 동네 동생의 말대로 사계절 입맛이 돌았던 적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거 같다. 아, 물론 무엇이든 잘 먹고 잘 소화해 내던 청춘의 시절 몇 년은 제외되어야겠지만. '1일 1식'을 결심하고 실행한 이후 아주 가끔은 보상심리로 소화를 시켜내지 못할 것만 같은 음식들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가령 이전에 사랑해 마지않던 돼지고기 불백이나 칼제비 같은 음식들 말이다.


그렇게 머릿속을 맴돌던 음식들을 단숨에 지워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습관은 놀랍도록 무서운 것이어서 점점 이런 음식들의 자극적인 맛이 희미해져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겨우내 움츠렸던 근육과 장기들을 원활한 모드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연명의 기능만 가진 누룽지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한 끼 식사지만 제대로 하자는 결심에 빨간 불이 들어오게 만든 건 큰 잘못일 터,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채소를 좋아하는 덕분에 늘 비치되어 있는 '양파, 당근, 호박'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있어보자 이 채소들을 이용해 당장 한 끼를 만들 수 있는 게 뭘까?' 아, 한 귀퉁이에 살짝 싹이 돋아 난 감자도 보인다. 오케이! 그래 , 감자까지 추가하면 오므라이스나 카레라이스는 금방 만들 수 있을 거 같다.


'1일 1식'을 하면서 오므라이스나 카레라이스처럼 따로 국이나 밑반찬이 크게 필요치 않는 한 접시 음식을 선호하게 됐다. 보통의 집밥처럼 차려 먹게 되면 나처럼 소식을 하는 사람의 경우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게 되므로. 해서 오늘의 점심메뉴는 카레라이스로 정해 본다.


카레라이스는 내겐 꽤 사연이 깊은 음식이다. 그래서 마음이 허전해질 때, 허기가 바다처럼 밀려올 때면 카레라이스를 해 먹곤 한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내 어머니가 자식들 건사를 하며 그들이 입맛을 잃는다 싶을 때, 자주 해 준 음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재료가 많이 소용되는 이 카레라이스를 가난한 내 어머니가 꽤 자주 해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한 번 해 놓으면 몇 끼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노란 카레라이스의 이국적인 맛을 우리 삼 남매는 무척 좋아해서 연이어 밥상에 울려 놓아도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지막한 부엌 찬장 한 구석엔 늘 대용량의 카레 봉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걸 기억한다. 엄마의 카레를 떠올리자 반짝, 잃었던 입맛에 불이 켜진다.


식용유를 두른 팬에 버터를 크게 한 조각 잘라 녹인다. 올리브유만 쓰는 사람, 버터만 쓰는 사람, 제각각이지만 나는 식용유와 버터를 함께 사용해서 약간의 풍미를 더해 준다. 이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먼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넣어 볶아야 한다.


다음에 불을 약간 줄이고 깍둑썰기한 각종 채소들을 넣고 함께 볶는다. 천일염 한 꼬집과 후춧가루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물을 적당히 부어 중불에서 속 재료들이 익을 때까지 끓인다. 여기까지는 별 다를 것이 없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전형적인 카레라이스 레시피일 것이다.


지금부터 나만의 비책을 더하기로 한다. 박스 안에서 시들시들 곯아가고 있는 사과 몇 을 꺼낸다. 썩은 부분이 꽤나 많아져서 어쩔까 궁리를 하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채소조각보다는 조금 크게 썰어서 한 편에 마련해 두고 시판 카레가루와 고형 카레 한 덩이를 재료들 속에 넣고 잘 풀어준 다음 다시 끓인다. 잘 끓어오른다 싶으면 이때 잘라 놓은 사과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 다음 불을 끈다.


사과를 넣은 카레라이스는 생각보다 맛있다. 사과가 가진 단 맛이 카레 특유의 향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이다. 다만 너무 빨리 넣으면 부스러지거나 사각거리는 감을 잃을 수 있기에 그것만 주의하면 된다.


아마 어린 시절 내 어머니가 해 주셨던 그 카레라이스에도 사과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몇 끼를 먹어도 물리지 않았던 그 맛의 비결, 그것이 사과라고 믿고 싶다. 외가나 친가에서 얻어온 흠이 나 있던 사과들이 카레라이스가 식탁에 오를 때면 꽤나 많이 사라지곤 했으니까.


카레라이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반찬은 뭐니 뭐니 해도 신 김치 만한 게 없다. 카레를 밥에 잘 비벼 한 숟가락 뜬 뒤, 시어진 김장 김치 한 조각을 올린다. 겨우내 마른 줄만 알았던 침 샘이 어느새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멀리 나가있던 미각을 불러들이기에 이 보다 더 좋은 한 끼가 있을까. 바로 지금 이 봄의 식탁에 말이다. 간단하지만 명료한 한 끼의 식사, 카레라이스로 소식좌의 1식은 어느덧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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