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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21. 2023

마음이 '갑갑'할 땐, 갑오징어 볶음을 먹자

소식좌의 1식 일기 일곱 번째


책을 기획하고 쓰느라 거의 2년여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여성의 삶'을 큰 주제로 두고 30대부터 50대까지 나이도 살아온 생의 결도 제각각인 세 사람이 마음을 다해 고군분투 중이다. 처음 기획했을 때만 해도 한 일 년이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래도 책을 한 권 이상은 내 본 사람들이라 글 쓰기 근육이 제법 단단하게 붙어 있기에 세 사람의 공력이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가도 싶었다. 근데 웬걸, 수정과 교정을 거치는 회의의 연속이다.


사실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진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극 'J'의 성향을 지닌 나라서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난겨울 과정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올봄엔 새 책을 주변에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도 여즉이다.


슬금슬금 육신은 지치고 마음이 답답해진 게 며칠째다. 가뜩이나 입맛이 없어 어떻게든 끼니를 거르지 않으려고 무한 애를 쓰는 중, 이런 일까지 겹치니 입안이 온통 까끌까끌하다. 그래도 회의가 있는 날이면 으레 셋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지라 무엇이든 먹게 되니 1식을 내 손으로 준비해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잠시 해방이 되는 기쁨이 있다.


거의 2년여를 함께 쓰고 봐오는 시간을 동행했으니 함께 나눈 점심의 횟수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어느 날은 도시락을 시켜 먹기도 하고 또 다른 어느 하루엔 오후 햇살을 받으며 가까운 식당으로 나들이 겸 점심식사를 하고 오기도 했다. 막바지에 와 있는 내 원고의 마지막 수정본을 함께 본 날이었다. 생각보다 회의가 빨리 끝나니 점심 메뉴가 걱정이었다.


매일 먹는 밥인데도, 매번 "뭘 먹지?"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숙명일까. 스마트 폰 앱 속에도, 문만 나서면 만나게 되는 식당들에도 메뉴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도 우리는 한참을 또 고민 해야 했다.


"선생님, 저번에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서 못 간 집 생각나시죠." J가 입을 뗀다.


"거기가 어디더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려 애써본다.


"왜, 거기 있잖아요. 갑오징어 볶음 하는 맛집이라고 했던 곳이요." 게 중 젊은 D가 정확한 위치까지 끄집어낸다.


"아.. 거기, 그래요 거기로 가요."


셋의 입맛이 다르고 거기에다 선호하는 음식도 분명 제각각일 테지만 그동안 우리는 웬만하면 메뉴를 정함에 있어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셋다 자신의 주장을 안으로 품는 내향성이기도 하려니와, 뭘 먹든 함께 나누는 점심 한 끼가 지니는 가치를 메뉴보다 더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대를 살아왔음에도 생각과 마음을 관통하는 글쓰기로 삶의 일부를 공유한다는 끈끈함이 우리들의 점심에는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갑오징어 볶음은 예상했던 것보다 맵고, 또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보통의 오징어보다 두툼한 몸통을 지닌 갑오징어의 쫄깃한 식감만으로도 비실했던 봄날의 미각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눈이 일시에 뜨이는 기분이 든 것은 덤일 테다. 피로를 회복시켜 주는 물질인  타우린이 풍부하다는 설명을 굳이 지 않아도 밥공기의 반을 비웠을 즈음 내내 갑갑했던 마음의 한쪽 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이날의 점심엔 너무 이른 브레이크 타임으로 인한 주인장의 재촉이 유일한 흠이었다면 흠이었을 것이다. 비록 느긋하게 오래도록 즐긴 점심식사는 아니었지만 갑오징어 볶음의 맵고 알싸한 맛 덕분에 거듭된 회의로 처진 어깨가 나란히 올라가는 환희를 맛보았다.


소식을 지속 하다 보면 맵거나 짠 음식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자극적인 향신료를 쓴 것들도 물론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들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가끔  이렇게 단숨에 눈이 확 뜨일 정도로 매운 음식들로 지친 몸과 맘에 위로와 힘을 얻곤 하니까.


책이 잘 마무리돼 세상에 나오게 되는 날, 아마 이 날의 '갑오징어 볶음'이 돌연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여차하면 봄바람에 날려 갈 것 같던 휘청거림 혹은 갑갑함이 감지 돼 스스로도 놀랐던 하루, 힘찬 기운으로 내장을 먼저 데워주고 종래는 마음까지 채워주던 한 끼의 식사였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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