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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린혜원 Mar 28. 2023

오므라이스 만찬이 소환한 추억 셋

소식좌의 1식 일기 여덟번째

최근 가장 핫한 음식이 있다면 바로 '오므라이스' 아닐까. 대통령이 일본 방문 시 먹었다니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하다. 그동안 오므라이스라 함은 예의나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먹는다기보다는 캐주얼한 음식으로 여겨왔기에 외교의 식탁에 놓인 오므라이스는 어쩐지 생뚱맞게 보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태생부터가 프랑스 음식인 '오믈렛' 에다가 '라이스'를 혼합해 새로이 창출한 일본식 음식이기에 굳이 따지자면 제대로 된 오므라이스를 맛보고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취향은 그야말로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누가 뭘 먹든 그 사람의 일이기에 이를 두고 '왈가왈부' 하는 것이 세상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이것이 국빈으로 방문한 나라에서 대접받은 대통령의 만찬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거다. 더해 만찬의 자리에서 오간 대화가 만찬의 의미를 퇴색시켰을 수도. 아무튼 생뚱맞게 등장한 대통령의 오므라이스 외교는 오므라이스에 대한 내 기억의 향유를 일시에 흩트려 놓긴 했다.


음식은 추억과 블루투스로 연결 돼 있다. 특정한 음식이 특별한 추억을 소환해 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아니든. 내게 오므라이스는 행복한 기분이 몽글몽글 피어오를 때 먹는 음식이다. 오므라이스와 관련된 추억 하나, 하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만들기에.


그 첫 번째 추억. 사춘기 시절 이유 없는 반찬투정이 심했는데, 생일 무렵 엄마가 모든 솜씨를 발휘해 만들어준 오므라이스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도시락 반찬이라곤 신 김치나 오징어채가 전부였던 시절 난 그 가난이 배인 도시락이 대단히 싫었던 모양이다.


"엄마, 제발 김치 좀 넣지 마라. 국물 배여 나와서 냄새난다 아니가."


김치를 넣어줄 수밖에 없는 엄마 맘도 모르고 매일이 이런 투정이었는데 어느 날 밥상에 전에 보지 못한 매끈한 외양의 음식 하나가 올라온 것이 아닌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쓰던 커다란 꽃무늬를 두른 접시에 노란 달걀 옷을 입고 있던 음식. 바로 오므라이스였다.


"함 먹어봐라. 이기 오므라이스라 카는 긴데 니 생일이라고 안 했나."


생애 첫 오므라이스였다. 야채 볶음밥에 포슬포슬한 달걀이불이 덮여 있어서 한 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노란 달걀이불 위로 휘둘러진 케첩은 아마도 미군부대 물품을 팔던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공수한 것이 분명했다. 오빠나 동생의 그것보다 두 배는 컸던 사춘기 생일날의 오므라이스는 엄마의 꽉 찬 사랑이었다.  


두 번째 추억은 대학선배인 'J'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한 해 선배이자 학보사 문화부 직속선배인 J와는 정서적 공감대가 퍽이나 많았다. 취향이나 생의 지향점이 비슷해서 그런지 몰라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시때때로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나 할 정도이다. 어느 하루 선 후배가 모인 자리에서 좋아하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너 지난번 SNS에 올렸던 오므라이스 너무 맛있어 보이더라. 너도 오므라이스 좋아하냐?"


"암요, 자주는 안 해 먹어도 오므라이스에 얽힌 저만의 추억이 있어서 오므라이스라면 뭔가 따스한 느낌을 받아요."


"진짜? 나도 그런데... 와 우리는 진짜 잘 맞는 사람들 같네."


얘기인즉슨 그랬다. 선배도 어린 시절 오므라이스와 관련된 추억이 있는 거였다. 선배는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가끔 예고 없이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매번 사주시던 음식이 바로 오므라이스라는 거였다. 선배는 늦둥이였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이 오므라이스가 그 사랑의 징표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하기야 그 시절의 오므라이스는 경양식집에나 가야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치부되었으니.


선배는 그때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오므라이스 맛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그와 비슷한 흉내를 내기 위해 매진 중이라는 거였다. 얘기 끝에 "네가 만든 오므라이스 맛도 무척 궁금한데." 라며 아련한 눈빛을 보낸 건 둘만 아는 비밀이다.


마지막 추억은 아이의 절친과 관련된 이야기다. 딸아이와 중,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둘은 몇 년째 학원동기이기도 했다. 하교시간과 학원 시간 사이 퍽이나 짧은 시간에 저녁을 먹어야 했기에 일하는 엄마였던 내겐 이게 큰 고민거리였다. 저녁 방송을 할 때는 아이가 스스로 차려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해두곤 했지만 오후 첫 방송을 맡은 시절엔 퇴근을 해와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 늘 빠듯했다.


한 번은 장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채소만 그득했다. 급하게 식재료를 넣어두는 보관함을 보니 통조림 햄이 있었고. 이럴 때 잘해주던 음식이 바로 볶음밥이었다. 아이가 좋아하기도 했고 다른 반찬 없이 김치나 장아찌만 있으면 훌륭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날은 아마도 봄바람이 불어서인지 아니면 퇴근 무렵 우연히 목격한 흩날리는 벚꽃 잎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기존의 볶음밥에 뭔가 멋을 좀 부리고 싶어졌다. 내 사춘기 시절 엄마가 해 줬던 그 오므라이스처럼 말이다.


얼른 요리책을 꺼내 제대로 된 오므라이스 비법을 챙겼다. 아이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추려니 마음이 바빠졌다. 오므라이스의 핵심은 밥을 참하게 덮어주는 달걀이불인데 이 날따라 만드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잘 완성된 오므라이스 두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는데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오늘 저녁은 뭐야? 와~~ 오므라이스네. 맛있겠다." 아이가 흩뿌리는 감탄사 뒤로 물체 하나가 더 보였다. 같은 단지에 사는 바로 그 절친이었다.


"엄마. **이도 같이 왔어. 어떻게 올 줄 알고 두 접시 준비했지? 역시 우리 엄마야."


쭈뼛거리는 아이의 친구를 식탁에 앉히고 장아찌 외에 멸치 볶음과 오징어진미채를 함께 내놓았다. 단시간에 완성한 오므라이스였지만 아이와 아이의 친구는 정말 맛있게 한 그릇을 잘 비워냈다. 내 몫으로 만든 오므라이스가 그렇게 아이 친구 몫이 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저녁시간으로 기억되는 하루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아이친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오므라이스였다고 한다. 물론 배가 많이 고파서였을 것이고,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셔서 사 먹는 저녁이 대부분이어서 그랬을 거 같긴 하다.


밥투정을 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와 아버지와의 추억에 미소 짓던 선배, 친구의 집에서 한 끼 밥을 먹었던 아이의 친구까지 오므라이스에 담긴 각자의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접시의 오므라이스가 가져다준 충만함과 사랑은 함께 느끼지 않았을까.

 

아주 가끔 해 먹긴 해도, 내겐 온통 따뜻하고 온전한 기억만 줬던 음식이 바로 오므라이스다. 오므라이스를 만들고 있으면 오므라이스라는 카테고리에 저장된 고운 기억들 때문에 자꾸 웃게 된다. 하지만 다오므라이스를 대할 때 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보다 외면하고 싶은 장면 하나가 떠오를까 싶어 걱정이다. 기억이란 늘 더 선명한 것들이 저장소 안에서 새로고침과 덮어쓰기를 하므로.


어쩌면 빠른 시간 안에 더 강력한 추억을 만들어 내 줄 오므라이스를 요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있는 식기들 중에 가장 근사한 것들을 골라 온갖 솜씨를 다 부린 오므라이스를 올리고 깊어가는 봄밤에 함께 취할 식객을 수소문해야겠다. 이런 것이 진정한 오므라이스 만찬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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