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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깨 May 16. 2021

지독하게 불편한 영화 <마더!>  

모성애, 그 아름답고 불편한 존재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마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보고 런던 레스터 광장에 있는 오디언 극장으로 향했다. 자리가 없어 맨 앞줄에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이 꽉 들어찼다. 트레일러도 보지 않았기에 영화에 대한 궁금함은 무척 큰 편이었다. 제니퍼 로렌스와 대런 아로노프스키, 연인 사이인 그 둘의 합작이라니 ! 감독의 <블랙 스완>을 보고 아름다우면서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이 영화에 비하면 기괴한 것도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시뻘건 화염 속에서 클로즈업된 여성의 두 눈이 마치 기선제압을 하듯 관객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남자가 잿더미 속에서 원석을 발견하며 기뻐하는 듯한 눈물을 흘린다. 원석에서 뿜어져 나온 알 수 없는 힘으로 잿더미였던 공간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신혼부부의 드림 하우스로 변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의 시작으로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는 듯 보인다. 



#종교적 상징 – 엔딩 크레딧 속 이름들



이 영화는 미스터리한 구석이 참 많다. 우선 주인공들의 이름이 단 한번도 불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엔딩 크레딧에서도 특별한 이름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제니퍼 로렌스는 Mother, 하비에르 바르뎀은 대문자 HIM으로 크레딧에 올라와 있다. 대문자 ‘HIM’은 신, 즉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친구와 함께 이야기하며 알게 되었다.  영화의 서사는 종교적 상징으로 점철되어있다. 집에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의사와 그 부인 역시 각각 Man, Woman으로 크레딧에 올라있는데 그들은 각각 아담과 이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부인은 정말 문 밖으로 걷어차서 쫓아내고 싶을 정도의 스트레스 유발 캐릭터였기에 왜 그렇게 설정했을까 생각해보니 이브기 때문에...인정이다. 결정적으로 부부의 두 아들의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 Cain slaying Abel > Peter Paul Rubens, (1608-1609)



 후반부 종교 의식(...이 장면은 영화를 봐야 그 충격을 실감할 수 있다)에서 사람들이 모여 피와 살을 먹는 장면도 예수의 '내 살은 너희 빵이요, 내 피는 너희 음료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모성 예찬과 여성혐오


에덴 동산과 같던 신혼부부 평화로운 저택은 이내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차면서 타락한 자들의 소굴처럼 변해간다. 이런 카오스 속에서 영화는 대사를 통해 내재화된 여성혐오를 낱낱히 드러낸다. 

의사 부인은 마더(제니퍼 로렌스)가 아기가 없는 이유에 대해 잠자리에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비웃는다. 그러곤 자신은 두 아들이 있다며 마치 우월한 지위에 있는 듯 행동한다. 우리는 모성을 예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예전에 주말드라마에서 보고 경악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며느리가 늦둥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엌에 코빼기도 안 보이던 남자들이 ‘제수씨는 엄마 될 사람인데 쉬셔야죠~’하며 집안일을 막 돕더라. 훈훈한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며느리가 시댁에서 존중 받으려면 애를 가져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역겨웠다. 모성을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무엇’으로 묘사하며 그 신비감을 강조하지만 이는 곧 모성을 여성이 누릴 수 있는, 누려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좌)성모마리아 (우) <Mother!> 포스터



마더(제니퍼 로렌스)가 분노하고 절규하자 집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녀에게 'cunt!'라며 욕설을 내뱉고 발길질하고 뺨을 때린다. 그 와중에 어떤 남자는 그녀를 성적 대상화하며 접근하고 그녀가 싫다고 하자 'arrogant cunt'라며 욕한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상적인 역할들을 보여준다. 남자의 요구에 거절하지 않는 순종적인 성격을 가져야 하고 섹시한 속옷으로 남편을 유혹할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아이와 집안일에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즉, 말도 안 된다는 거다. 사회와 미디어가 얼마나 여성에게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가.. 공지영 작가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나온 이 구절이 생각난다.


하지만 어머니가 되었을 때 혜완은 생각하곤 했었다. 그 감격스런 동화 속에는 분명 근본적인 물음이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악마가 아기를 가져갈 때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었던가? 아기의 아버지는? 친척들은? 사회는? 모두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리하여 그녀가 다시 아이를 찾으러 나섰을 때 그들은 어디 있었는가? 왜 그녀 혼자서만 발을 찔리고 눈을 뽑아내는 고통을 치러야 했나? 다른 이들은 어디 있었는가? 대체 어디 있었는가?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로 '모성 알러지'가 생겨버린 것 같다고 하면  무리일까?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 약해지는 뼈, 모유 수유의 고통,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끝없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모성'이라는 한 단어로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것은 모순이다.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출산과 육아는 판타지다. 모성이라는 엄청난 힘을 가진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모성에 감탄한다. 그러나 거부한다. 적어도 엄마가 되는 선택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바뀔 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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