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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로 시작해서 효년이 된 여행 첫날
첫날부터 탄로 난 나를 위한 효도 여행
by
빌레펠트
Dec 6. 2024
아시아국가 여행만 다닌 엄마에겐
그동안 가장 오래 비행기를 탄 시간이 5시간 남짓이다.
인천-로마는 13시간의 비행시간.
우선 항공편 예약부터 엄청난 고민을 했다.
1번.
경유를 하더라도 외항사 비즈니스석을 예약할 것이냐.
2번.
직항으로 국적기 이코노미석을 예약할 것이냐.
1번의 경우,
300만 원가량을 더 지출해야 했고 총 여행일정에서 2일가량이 증발된다. 경유지
대기시간과 총 비행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직장인 입장에서는 돈도 아깝지만 시간이 더 아깝다.
2번의 경우, 비교적 짧은 비행시간과 우리나라 대표 항공사를 이용한다는 엄마의 만족감이 뒤따르겠지만 이코노미석에서 약 13시간이라는 비행시간이 엄마에게 괜찮으실까 걱정이 되었다.
'스위스' 일정을 5일 넣었기 때문에 꽤나 여행경비를 넉넉하게 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직항 비즈니스석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만 비즈니스석에 모시고, 나는 이코노미를 탈까도 고민했지만 부활절 주간이라 그런지 인기노선이라 그런지 로마를 향하는 국적기 이코노미도 꽤 비쌌다.(고작 35년 치 효심은 그다지 충만하지는 않나 보다.)
MBTI를 신뢰하진 않지만
어찌 됐건 J인 나는 온갖 정보를 뒤져서, 아시아나 A350의 경우 유료 구매할 수 있는 좌석 중 스마티움이코노미 좌석이 꽤 넓다는 정보를 찾았다.
운이 좋으면 옆자리가 빈 경우도 종종 있어 편하게 비행했다는 후기도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비상구좌석은 선호하지 않아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고민 끝에 2번 직항 이코노미석을 선택하고, 로마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운항편 중 A350이 배정된 일자와 시간에 맞춰서 이코노미석을 예약했고, 2명 기준 약 40만 원을 추가지불해서 유료좌석을 배정받았다.
내 선택의 결과는, 일단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고민 끝에 결정한 좌석은 창문을 온전히 2개를 차지했고, 키 170cm인 내가 다리를 쭉 뻗어도 앞에 발이 닿지 않았으며 옆자리는 공석이었다.
비행기에서는 내가 차지하는 창문 갯수와 편리함이 비례한다. 물론 가격도.
탑승하자마자 승무원께서 티켓을 확인하면서 "어머, 좋은 좌석으로 잘 예약하셨네요~ 참고로 옆자리는 공석이니 편하게 두 분이 쓰시면 되겠습니다."라고 하셔서 엄마의 만족도가 더 올라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장실 근처 좌석은 선호하지 않아, 내 앞은 화장실이 아닌 창고다.(J의 정보력)
3-3-3 배열의 창가좌석이지만
복도 쪽 1자리가 공석이라 화장실가기도 편하고, 화장실은 반대
편이라 내 좌석 근처에 사람도 몰리지 않는 행운은 내가 열심히 검색해서 준비된 행운이라고 스스로 칭찬했다.
그런데 이륙 후 3시간쯤 지났으려나?
엄마가 돌아가는 비행편은 비즈니스로 바꿀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신다.
아... 아직 로마에 도착하려면 10시간은 남았는데....
나는 사전에 알아봤던 내용을 읊었다.
"비행기 탑승 3일 전부터 비즈니스 좌석이 여분이 있을 경우에 한해 추가금을 지불하면 업그레이드할 수 있어. 10일 뒤 우리가 베른에 도착하면 가능 여부를 알 수 있을 거 같아. 그때에도 비즈니스로 바꾸고 싶으시면 그렇게 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푹 자."라고 말했다.
하.... 여행 중 2일을
증발시켜 버리고, 300만 원을 더 지불하고라도 외항사 경유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할걸...
후회되던 순간이었다.
비행편만 2주 동안 찾아보고, 온갖 후기를 다 뒤져서 베스트 초이스라고 자만했던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탑승하자마자 승무원께서 좋은 좌석이라고 해주셨을 때의 그 뿌듯함은 온데간데없이 온 신경이 엄마의 불편함을 좇는 데에 쏠렸다.
엄마는 나보다 날씬하고 평소 운동도 많이 하셔서 체력이 더 좋으시다. 그래서 비행 중에 무릎이 아프진 않을까, 허리가 아프진 않을까에만 초점을 맞춰 넓은 좌석으로 선택한 건데.
여행에서 첫 후회가 너무 일찍 찾아왔다.
.
돌아가는 비행편 비즈니스 업그레이드 여부에 대한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시간은 올 때보다 3시간 줄어든 10시간이기도 했고, 2주간 여행에서 행복을 많이 충전한 엄마는 이코노미를 타고 갈 수 있으니 비즈니스를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돌아가는 날 공항 가기 직전, 독일 백화점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겨울 외투를 세일가격으로 구입한 직후에 비행기를 탑승해서인지 10시간의 비행시간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하셨다.)
.
나는 평소에도 여행할 때 예산을 넉넉하게 잡아놓는 편이고, 거기다가 예비비로 100만 원 정도 더 챙겨간다.
100만 원 정도 더 쓴다고 마음을 먹으면, '여행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해서 즐길 수 있는 내 성향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엄마와 같이 가니까 특히 더
여유 있게 예산을 잡았고, 숙소도 좋은 위치에 꽤 좋은 곳으로 예약했으며, 기차는 모두 1등석으로 예약했다. 공항-시내 이동수단도 오직 택시였다.
비행편도 직항 국적기에, 넓은 좌석으로 편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출발 3시간 만에 주의보가 내렸다. 엄마가 눈치를 준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시무룩했던 것이다.
뒤이어 '내가 보여드리고 싶은 것에 대한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더 여유 있고 편안하도록 준비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와 반성이 봇물 터지듯 몰려왔다. 직장인인 나한테나 비행이동에 할애하는 2일이 아까운 거지, 엄마에게는 편안하게 여행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런 종류의 후회와 반성은 여행 중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사람은 후회와 반성을 통해 더 나아진다고 하는데, 그러기엔 2주라는 시간은 짧았고 내 효심은 그때마다 금세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수천번을 속상하고 화나고, 또 인내하셨을 텐데.
나는 효도여행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해 놓고, 반성의 마음이 고작 2주도 못 가는구나.
여행에 돌아와 내 이런 소회를 들었던 직장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효녀로 시작한 여행에서, 효년이셨군요?"
결과적으로는 엄마가 100만 원가량 더 여행경비를 내셨고, 인터라켄-루체른 골든패스 기차 안에서는 감동이 넘친 나머지 여행가이드(=나)에게 팁까지 하사하셨다.
무슨 팁이냐고 극구 사양하며 돌려드리려는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 유럽에서는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팁을 주잖니? 내가 지금 딱 그래!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해서 이런 여행을 준비하고
함께해 준 딸에게 팁을 주는 거야. 유럽에서 유럽스타일로 주는 거니까 받아."
나는 나를 효녀로 둔갑시켜 놓고,
오직 엄마만을 위해 준비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효녀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던 나'를 위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나 이만큼 엄마를 위해서 준비했어요. 알아주셔야해요.'라는 속내가
엄마가 '비즈니스 좌석'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들통나버렸고,
35년 치 효심의 밑천을 스스로 발견해버린 나는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효년의 여행이 효녀의 여행으로 바뀌었을까?
글쎄... 효녀가 되고 싶었던 딸에게 엄마가 맞춰준 여행이었다고 돌이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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