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your flaws I’m interested in.
나는 왜 K를, K'를, K''를, K'''를 만나왔을까.
내 지난 연애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물음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지만 비교적 확고한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 결론이라면 결론.
규범, 논리, 세계의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면서 그 에너지를 창작욕으로 전이시키는 사람.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세련된 사람, 한 편의 웰메이드 블랙코메디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은 조용한 심해의 잔물결 같아 언제고 거세게 일어나 나를 집어삼킬 수 있다. 파도가 밀려올 때 바다의 의도와 진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높은 파고로 드러나는 힘, 모든 것을 장악하는 파괴력, 중요한 건 그렇게 모조리 집어삼키기로 결정한 바다의 의지뿐이다. 결국 의도는 의지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파도에 잠식되곤 했다. 에너지, 그 사람의 *파토스적 에너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항상 똑같은 래퍼토리였다.
*파토스: 일시적인 격정이나 열정. 또는, 예술에 있어서의 주관적·감정적 요소.
하루키가 말하길 재능은 화수분 같은 게 아니어서 모두 소진해버리면 그 잿더미가 작가의 무덤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은 하루에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여튼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창작에 몰두한다고. 작가로서의 성실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영감이 빗발칠 때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였다.
마라토너 같은 그의 삶도 나름 멋지지만, 예술을 가능케 하는 주관적 요소로서의 파토스가 그렇게 조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념, 충동, 정열을 뜻하는 파토스는 이성의 판단과는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이며 종종 이성의 명령에 불복까지 한다. 그래서 스토아학파에서는 이를 두고 ‘병’이라고 명명하기도. 뭐 스토아까지 갈 것도 없다. 시쳇말로 이러한 의식 하의 근원 충동을 가리켜 ‘중2병’이라는 둥 ‘마음에 병이 있다’는 둥 이미 우리는 병 취급 하고 있으니까.
그치만 온갖 아름답고 섬세한 것들도 이 병으로부터 나온다.
광증에 가까운 열정을 모조리 소진한 뒤 허무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부조리와 폭력 앞에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을 고독한 영웅주의로 관철하려는 태도, 혹은 반복되는 비극적 서사에 맞서는 처절함. 꼭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내가 애정을 느끼는 생의 서사는 이런 종류의 것이다.
니체라면 이런 레퍼토리를 딛고 일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초인적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식의 거대한 자기 극복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인간의 취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삶을 견인하고, 그 결함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삶이 예술로 기억된다고 여겨질 뿐.
어쨌거나 하루키의 오랜 성취는 이 같은 자기파괴적 서사를 멀리 했기에 가능했던 게 맞다. 비록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연마해 온 테크닉과 에토스적 논리로 직조된 것 같아 내겐 너무 서늘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