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휴리스틱', 혹시 겜블러세요?
나는 이상한 고집으로 레드(red)에 돈을 걸었다.
나는 극단적인 모험을 해 구경꾼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나는 모험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주위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소리쳤다.
"이미 열네번이나 레드가 나온 다음이란 말이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노름꾼⌟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카지노에서 카드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이 게임은 룰렛을 하듯이, 블랙과 레드로 나뉜 카드열(row) 중 한 쪽이 이길 것으로 보고 돈을 거는 것이다. 구경꾼들은 이미 여러 차례 잇달아 이긴 레드가 또 다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이바노비치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하지만 생각이 짧은 건 바로 그들이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라 일컫는 잘못된 추론의 한 예를 보여준다. 사실 여기서 블랙이나 레드가 나올 확률은 같다. 하지만 이는 수백, 수천번 게임을 반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짧은 기간에는 얼마든지 그 확률과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이바노비치가 게임을 한 어느 겨울 밤, 레드가 열네 차례나 잇달아 나오는 희한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다음에 당연히 블랙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사고의 오류라는 뜻이다.
더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동전 던지기를 한다고 했을 때, 스무 번 연속으로 같은 면이 나올 확률은 1/1,048,576 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맨 처음 동전을 던지기 전에 기대하는 확률일 뿐이다. 그러니까 동전을 던지기 전에, ’만일 앞으로 동전을 20번을 던져서 계속 같은 면이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고 자문했을 때 이에 대한 대답이 저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미 19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온 다음이라면, 스무 번째 던지기에서도 앞면이 나올 확률은 그냥 1/2이다. 열아홉번이나 같은 면이 나온 것은 분명 대단히 놀랍고 희한한 일이지만 이미 100프로 확정된 사실이며, 이 사실이 스무번째 던지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무심한 동전이 지난 19번의 던지기 결과를 기억할 리는 만무하다!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 논리적 사고의 오류를 인간의 경향성 가운데 하나인, '휴리스틱'(Heuristic)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이 부딪히는 모든 상황에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주어지는 모든 정보와 자극에 대해 종합적 판단을 내리려 한다면, 이는 인지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어림짐작을 사용하는데, 이 때 어림짐작의 판단기준 혹은 방법이 되는 것이 '휴리스틱'이다. 이는,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굳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효용이 있는 반면에, 바이아스(Bias)라는 사고의 오류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앞서 말한 도박사의 오류가 휴리스틱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지 편향이다.
제목에서는 연애 운운하더니 왜 휴리스틱을 운운하고 도박사의 오류를 운운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연애에 임할 때에도 이 '휴리스틱'을 사용해 행동한다는 점,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인지편향이 특정한 결과를 산출하고, 이것이 다시금 경험치로 축적되며, 따라서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된 휴리스틱을 가지고서 연애에 임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특히나 '감정 휴리스틱'(Affect heuristic)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여기지만, 인간은 많은 경우 감정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검은 공이 10개 들어 있는 A 항아리에 황금색 공이 1개가 들어 있고, 검은 공이 100개 들어 있는 B 항아리에 황금색 공이 8개가 들어있다. 확률적으로 A 항아리에서 황금공을 뽑을 확률이 10%이고, B 항아리의 경우 8%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황금공을 뽑기 위해 B 항아리를 택한다. 왜냐하면 확률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눈에 8개의 공이 보일 때 직관적으로 이에 먼저 반응했기 때문이다.
영화 <건축학 개론>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스무 살의 승민이 서연에게서 등을 돌린 건 그녀가 술에 취해 선배와 함께 방을 들어서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녀와 선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단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불안정함은 누구에게나 그 파동이 꽤나 역동적이다. 사랑의 경험이 부족한 승민은 관계를 리드함에 있어 자신감이 부족했을 것이고 내적으로 불안정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른 살의 승민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법한 섣부른 판단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서연은 얼마 후 왜 연락이 안 되냐며 승민을 찾아오지만, 이미 파국은 두 사람의 여린 사랑을 삼켜버린 뒤다. 승민은 제발 꺼져달라는 막말을 그녀에게 쏟아내고선 혼자 뒤돌아 눈물을 삼킨다. 하지만 관객들은 안다. 서연이 좋아하는 사람은 승민이라는 사실을.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려고 혼자 빈집으로 향했던 것도 그녀라는 사실을.
승민은 왜 서연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그런 경솔함을 범했을까?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감정은 언제나 '알고리즘'보다 '휴리스틱'의 경로를 따라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남녀 관계는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문제에 해답을 추구해 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알고리즘적 사고를 적용하기 힘들다. 반면 휴리스틱은 이성이나 합리성 보다는 누적된 직/간접적 경험에서 비롯된 직감 또는 직관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므로 애정 문제에 적용하기 좋은 방법론이긴 하지만, 최대 단점은 바로 승민이 범했던 것 같은 '편향'을 낳기 쉽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정보와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다 보니,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기 쉬울 수밖에 없다.
결국 연애를 망치는 것은 감정적 휴리스틱이 낳은 인지편향이다. 그리고 지인들의 연애 조언을 참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격려하고 염려해주는 지인의 따스한 마음만 받으시라! 밤늦도록 진실되게 얘기해주고 내 하소연 들어주는 그들이 있다는 것은,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괴로워하고 잠 못 이루는 나를 보며,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할 것이다. 타인의 개인화 된 인지편향만큼 따르기에 부적절한 가이드가 있을까? 당신이 희박한 확률에 배팅하기 좋아하는 겜블러가 아니라면, 나의 제안은 언제까지나 '아니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