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은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본질 그 자체
Hell is other people.
그렇다. 관계의 종말은 나락이요 지옥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결말을 사랑이라는 감정이 바닥난 것 쯤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종말의 유보를 위하여서는 밀당이 필요조건인 것처럼 생각한다.
오늘 나는 밀당이 관계의 성립에 있어 선택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순수한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다. 밀당 따윈 하지 않겠다.' 류의 논리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타인은 지옥이다."
한번쯤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말. 사르트르는 '타인'을 '나를 바라보는 자'라고 규정한다. 타인 앞에서 나의 신체는 언제나 그 타자의 시선화에 놓이게 되고, 나는 항상 어딘가 불안함 혹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나와 타자는 만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계량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객체로 사로잡고자 한다. 그리하여 각각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무한한 투쟁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성을 '시선 간의 투쟁'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시선으로써 나를 화석화(化石化)시키고자 하는 타자에게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은 '나'의 존재에 관한 비밀이기도 하다. 곧 타자가 나를 소유하려 한다는 사실이 '나'를 존재케 한다는 것, 그러니까 타자가 내 존재를 애써 화석화시키려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생명체도 없는 진공의 공간에 태어날 때부터 자존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그러니까 타자와의 투쟁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의 시선 앞에 화석화 되어 객체로 전락할 것인가. 썸부터 연애까지 그리고 결별의 수순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지겨운 존재론적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물론 '연애'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 안에는 쌍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 지고지순한 순정과 무한한 신뢰가 함께 요구된다. 그러나 그러한 윤리적 채무의식이나 덕(virtue)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그것들은 발생론적으로 '존재' 한참 이후의 문제다.
만일 상대가 나의 애정을 거절하면, 나는 상대방에게 다가설 수 없다. 그러나 상대가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모든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일진대,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고 내 마음대로 움직일 때, 상대방의 자유는 스러져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내던진 상대방은 바위나 나무와 다를 바 없다. 자유가 사라진 존재는 사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 시선간의 투쟁이 지속되는 것, 쉽게 말해 서로의 존재에 대한 사로잡힘과 사로잡음의 연속, 즉 밀당이 계속 되는 것이 연애이다.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소모되는 감정, 쌓여가는 고민들과는 별개로 안타깝게도 연애의 본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편안한 연애가 좋은 것'이라는 믿음 체계를 공유한다. 그것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인 것처럼 생각한다. 숱한 격정과 갈등 끝에 학습하고 내면화시킨 결과일 터이다. 우리가 이상적이라 믿는 관계가 무엇이건 간에, 관계의 본 모습은 이처럼 우리의 희망 사항과 다를 수 있다.
만일 그가 당신에게 첫 눈에 반했다면, 그리하여 기꺼이 자신의 모든 자유를 당신에게 자발적으로 반납한 채 맞춰준다면, 처음 만난 순간, 바로 그 최초의 눈맞춤부터 당신의 시선은 그를 객체화시킨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선간의 투쟁이 항구적으로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그 무엇보다도 '자유'에 근거하므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객체의 의지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그와 당신의 관계는 변증법적 운동의 지속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와 당신 사이의 투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넘나든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헌납하며 다가오는 이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존재론적'으로 약한 주체의식에 매혹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외모, 스펙, 능력 등 주체의식의 왜소함을 감추려는 피상적 가치들은 길게 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바위나 나무와 연애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위해 자유를 걸고 나처럼 투쟁하는 또 하나의 주체와 연애하고 싶은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동등하다,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말이다.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 뿐이다. 그 자유를 의식하기만 하면 된다. 비록 현대 사회의 경향성이 우리의 결핍을 폭로하고 이에 집중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시선간의 투쟁에서 마음껏 괴로워하자. 또 상처받자.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내 자존감을 깎아 먹지도 말자. 그것이 관계의 본질일지니.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이다. 강렬한 타인의 시선 앞에 강렬한 시선으로 받아칠 것. 동등한 투쟁 관계에 당당히 맞설 것. 그러나 동시에 상대의 자유를 수용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대타자가 될 것. 그렇게 서로의 일부가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