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로 대답하고 당신에게 되묻는다
Finally, an oasis in this wasteland.
흔히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애정'을 느낄 때, 이 특수한 감정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자.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누구이건 간에,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우리에게 강렬한 열정을 느끼게 만드는 그 '조건'말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따르면,* 우리의 주관 안에 소여되는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시간'이라는 범주에 갇히기 마련이다. 우리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주관의 형식에 의거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 매 순간 감관에 주어지는 다양하고도 방대한 정보들을 종합하는 것이 '나'라는 자아라면,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애초에 이런 사고 작용이 가능하게 하는 틀 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의식 안에 주어지는 모든 대상은 이미 시간성을 투사하고 있는 셈이다.
칸트 철학에서는 감성(sense)과 감정(feeling)의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 감성이든 감정이든 자연 존재로 서의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서로 구별되는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소고는 감정 및 감성이란 무엇이며 기능적 차이는 무엇인가, 감성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의 비교 등 칸트 철학의 개념들에 대해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 인간 심리에 대한 인식을 포괄해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에 대해 큰 틀에서 조망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시간'이라는 틀 자체는 '시간성'을 초월해있지만 시간 안에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러한가? '유한성'이 대상 안에 기입되고 마는 까닭은, 바로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관, 즉 '나'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 탓이다.
한 사람을 만난다.
그를 바라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체취를 맡는다.
그의 언어,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온도, 손길의 부드러움, 목소리의 톤, 모든 주어지는 정보들은 매시각 매 초 분절되어 전달된다. '나'는 모두 종합하여 '그'라는 사람을 인식한다. 이러한 의식의 작용이 가능한 까닭은, 그 사람과 나의 관계는 이미 어떤 특정한 시공간이라는 좌표 안에, 곧 '현실'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과연 시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을 초월해, 현실 너머에서 나-너, 곧 '우리'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 범주 안에 소여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시간성'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것을 우리의 본능은 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기입된 하나의 욕망과 마주하게 된다. 태고의 시절부터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욕망, '영원성'에 대한 갈망. 욕망의 메커니즘은 무의식이 발동해 의식에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한낱 사라질 시간 속에 '그'를 내어주지 말라고. 그것은 정념의 형태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제 나는 그를 원하고 바라게 된다. 깊은 애정을 느낀다. 애정은 정열이 되고, 이 강렬한 정념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인식한다. 이처럼 우리 의식 너머, 무의식의 차원에 깃들어진 타자에 대한 욕망과 마주할 때, 우리의 영혼 안에서는 대단한 지각 변동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이를 거룩하고 숭고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의 뇌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인식의 작용을 '사랑'의 형태로 느끼도록 옥시토신을 분비하는, 그러니까 단순하다면 한없이 단순한 화학 작용일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뇌의 명령은 끝끝내 우리를 기만하고 만다.
기어코 끝이 나버릴 관계성 안에서 나는 그를 욕망한다. 여기에는 이미 구조적인 모순이 깃들어 있다. 언젠가 끝이 날 것이기에 욕망하고, 기어코 끝이나기에 그것은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욕망이다. 그렇게 욕망은 욕망으로만 남게 된다. 요컨대, 유한한 시간성 속에서 그와 나의 관계가 결코 영원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사랑인 셈이다. 하지만 애초에 욕망의 차원에만 머무를 뿐 완결될 수 없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인식이라는 로고스에서 출발하여, 사랑이라는 파토스로 귀결되는 이 과정은 대단히도 파괴적이다. 내가 그것을 사랑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일부가 된다. 언젠가 그것이 스러져갈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욕망으로서 나의 일부이다. 그 욕망은 언제고 되돌아와 나의 일부로 남거나, 혹은 나를 완전하게 몰락시킬 것이다. 이제 나는 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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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할 수 없고 사라질 것에 대해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당신에게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