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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wkey Aug 29. 2019

3. 첫눈에 반한 사랑, 그것이 남긴 상흔에 대해(1)

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은 파국으로 끝이 날까?

인간의 심리를 가장 깊숙하게 들여다 본 심리학자로 평가받는 '융'에 따르면, 자아는 두 가지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1) 하나는 외부세계와 접촉하기 위한 것이며, (2)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부 세계를 위한 것이다. 전자를 '자아(Ego)'라, 외부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양식을 익히면서 획득하게 된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Persona)'라 부른다. 내가 보통 마주한 타인의 모습은, 그가 상황과 맥락에 맞게 걸치고 있는 그의 가면 곧 페르소나일 것이다. 한편 자아는 내적인 세계 즉 무의식에 적응하는 내적 태도를 가지는 내적 인격의 특성을 갖기도 한다.


이때, 개인의 내적 인격은 두 가지 정신, 남성성(Animus)여성성(Anima)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규범적이거나 사회적 차원에서 통용되는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아의 내적 인격에 깃든 특성 가운데 한 축을 말한다. 이것은 자아의 면모이므로, 그 사람의 외모나 피지컬과도 무관하다. 다만 생물학적으로도 한 신체 안에서 양성의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처럼, 남성의 정신 안에도 여성적인 특성이 존재하고 여성에게도 남성적인 특성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회에서 생물학적 자아와 불일치하는 내적 인격의 발현을 가급적이면 억압하도록 종용하다 보니, 남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여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성은 우리의 자아 의식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그림자 인격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내용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이나 감정, 소망 등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하는데,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남성의 무의식 속 아니마와 여성의 무의식 속 아니무스가 서로에게 투사된 결과다.


요컨대 강렬한 사랑에 빠진 느낌은, 사실상 무의식의 투사다. 융은 첫눈에 빠지는 사랑, 결혼을 파괴하는 외도, 성적 환상, 동성애, 그리고 자기 실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의식의 투사가 미친 영향이라고 보았다.



K는 의존성 알코올 중독자였다. 독립 영화 몇 편을 찍었지만 변변히 필모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2년째 다듬는 중이었는데,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데이빗 린치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딱 그만큼의 무력감으로 점철된 상태였다.


무척 추운 겨울날, 우리는 어두운 와인바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출입구를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들어오더니 직원에게 발렛파킹을 물었다. 짧은 대화 이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찾아내는 데에는 단 한 번의 두리번거림도 없었다. 쭈뼛거림 없이 다가와 의자를 빼서 앉으며 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말수가 적고 어두운 표정의 사람이었다. 이색적이었다. 첫 만남이었음에도 우리 사이에 겉도는 문장들이 전혀 없었다. 대화가 많거나 말의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와 나눈 대화 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과 끈질긴 시선에서 더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융'은 영혼의 여성적인 특성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남성과는 그렇게 다른 심리를 지니고 있는 여성은 남성이 전혀 눈 뜨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원천이다." 아니마의 특성은 주로 막연한 여러 느낌과 기분, 예견이나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 사람의 능력, 자연에 대한 느낌, 그리고 무의식과의 관계 등과 같은 심리 경향들이 인격화로 나타날 수 있는 특성들이다. 이런 심리적인 경향은 여성이 남성보다는 수용적이며, 분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느낌으로써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여성의 촉은 그 무엇도 못 속인다'고 한다. 아니마의 육감과 예감은 여성이 그토록 자랑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여성의 무의식이 예민하게 작용하여 남자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을 직감하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논리적인 과정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성이 갖는 우월성이다.


부드러움과 유연성 역시 아니마가 갖는 매우 특징적인 특성이다. 성질이나 태도가 억세지 아니하고 매우 따뜻한 것, 유연하게 사고하여 모든 것을 원만하게 만드는 특성. 남성이 맺고 끊음에 있어 완고한 로직을 사용함에 비해, 여성의 부드러움과 유연함은 사태를 단정하여 갑작스러운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시간을 갖고 대응하게 하여 사태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흔히 말하는 예술적인 요소, 가령 음악적인 재능을 보이는 것이나 고도의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것, 그리고 섬세한 필치로 글을 저술하는 것 역시 모두 아나마의 특성을 힘입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과 양육 역시 매우 아니마적이다. 사랑과 양육은 생명체를 아끼고 기르는 특성이다. 아니마가 사랑과 양육에 기여하는 까닭은 수용성과 포용성 때문이다. 수용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특성이고, 포용은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논리적으로 효용을 계산하고, 등가 교환의 원칙을 경제적으로 사고하는 것과는 대별된다. 모성애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한다. 죽는 순간까지 모태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갖는다. 그것은 왜인가? 우리 본능 안에 기입된 모성이란, 등가 교환의 원칙과는 상관 없이 모든 잘못을 감싸주고 가장 안전한 그늘이 되어주는 것으로 이해되는 까닭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남성이 기대하는 사랑과 행복에 관련되는 특성은 어머니의 따뜻함, 부드러움 따위의 남성이 가질 수 없는 여성의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남성이 영원히 그리워하는 여성성이자 모성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기 내면의 아니마로 인해 남자는 마음에서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또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아니마는 남자에게 있어서 적절한 결혼 상대자를 찾는 능력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견해에도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아니마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을수록, 유난히 자기 안의 원형적인 모성성에 근거하여 이상화된 여성상을 추구한다. 그렇게 남성이 상대에게서 발견하는 이 원형은 성적 욕망으로 발현한다.


사흘에 한번 꼴로 만났던 것 같다. 딱히 데이트라고 부를 만한 건 아니었다. 블라인드 내려진 어두운 거실에서 오래된 LP판을 틀고 향을 피운 채 함께 와인을 마셨다. 그러다 해가 지면 정처없이 걸으며 추운 밤바람을 쐬고, 다시 집에 돌아와 커피를 내려 마시며 서로의 취향과 정서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몸을 녹였다. 그와 만나면서 나는 일을 자주 쉬었고 점점 더 현실감을 잃어 갔다. 낮과 밤, 평일과 주말, 나와 너, 현실과 낭만 모든 경계가 모호해져 갔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면서 나는 점점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반응하는 그의 예민함, 세상에 대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의 모습, 독특하고 복잡한 내면세계. 그 모든 것을 내가 잠잠히 수용해주길 바라던 유아기적인 욕망.


그가 쓰던 시나리오는 여성 싸이코패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상처받지도 않지만 정작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상대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주인공에 대한 것이었다. 폭력적인 서사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사랑에 대한 갈망도, 좌절된 사랑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다. 화답받지도, 수취되지도 못 할 열렬한 사랑이야 말로 가장 괴로운 감정일 것이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 고통을 휘두르는 것 뿐이었다.


그가 쓰던 이야기 만큼이나 온통 모순적이고 어긋나 있는 그의 성향과 기질은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났다. K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 꼭 술을 필요로 했다. 취기가 돌 정도로는 공허함이 달래지지 않는지, 진탕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야만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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