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물건이 나를 말한다'는 좀 구태의연한 이야기
#꾸준히 글쓰는 연습 + 한국어 연습을 위한 일환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수필을 업로드하려고 한다. 주말을 놓쳐 밀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그다음 주에 두 개를 쓰는 식으로. 올해 연말에 52개의 글을 돌아보고 싶다. 12주를 그냥 보냈으니 당분간은 손가락을 바삐 놀려야 할 것 같다. 다소 개인적이고 급하게 쓰는 글이니만큼 완성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 브런치에 잡소리 하나 더 늘리는 것뿐일 텐데 결국.
네덜란드의 가장 놀라운 점은, 대도시인 암스테르담에서조차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가게가 무척 많다는 점이다. 아직도 현금결제 중심 사회인 독일에서 신용카드 사용이 드물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 경험상 독일은 네덜란드에 비하면 거의 한국이다. 여기에선, 마진이 낮은 식료품 업장에서는 유기농 제품만 취급하는 고급 식료품 가게가 아니고서야 현지 은행 발급 체크카드로만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양질의 물건과 신용카드 이용으로 쌓이는 포인트는 사악한 가격표를 감내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니, 아무 마트에나 가서 대충 장을 볼까 아니면 좋은 식품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걸 사고 카드도 멋지게 그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난 매일 햄릿이 된다.
어쩌다가 다른 일로 방문하는 곳 옆에 그런 식품점이 있으면 그 핑계로 뭘 잔뜩 사서 집에 들어온다 - 프랑스산 버터, 24개월 숙성 이탈리아 치즈, 냄비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앤초비 같은 것들 (싸고 대량 생산된 앤초비는 그렇게 스며들지 않고 말린 멸치 같은 모양이 돼서 요리를 망친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는데, 뭘 담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갑자기 내가 지금 사는 것이 단지 오늘내일 일용할 양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불현듯 글을 쓰게 됐다. 장보기란, 늘 필요한 물건을 다시 마련하는 작업과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영역을 구축하는 일이 예산이라는 한계 안에서 벌이는 싸움이다. 예산의 제약이 커질수록 마지막으로 선택된 물건에는 더 강한 서사가 존재하게 되고 - 예컨대 소금이 떨어져서 요리를 할 수 없다던가, 단백질 결핍으로 이제는 스테이크를 먹을 때가 됐다던가 - 만족도를 더 꼼꼼하게 따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슨 이유로 결정했든 오늘 내가 산 음식이 과연 '나 같은가'를 더욱더 따지게 돼서 장보기에 예전보다 더 큰 의미를 두게 됐다.
프랑스에서의 일이다. 온갖 먹거리가 풍부한 나라답게, 제법 대도시에도 주말에는 큰 장이 열리고 온갖 신선식품들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주말에 마침 동선이 겹치게 돼서, 직장 동료 (+그의 파트너)와 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난 얘들을 만날 즈음 이미 시장을 두 바퀴 돈 상태였고, 마트에 비해 딱히 싸지도 않은 물건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재다가 치즈 한 덩이 무화과 몇 개를 샀던 것 같다. 이 친구들도 장을 봐야 했으니 한 바퀴를 더 돌기로 했다. 아무 기대도 없었다, 시장이 정말 구려서 살 게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1시간 여 뒤, 나는 가벼운 취기와 엄청난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시장에서 멀지 않았던) 그들 집의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 둘은 온갖 흥정을 하며 시장을 휩쓸었고, 일정이 없으면 밥 먹고 가라고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재료는 후식 빼고 모두 그날 산 것 - 새우와 작은 절임 생선에 레몬, 오리 파테 그리고 아침에 나왔다는 바게뜨 - 이었고 냉장고에 늘 있던 사과 콩포트와 와인도 빠지지 않았다. 처음 먹어봤던 건 없었다. 맛있다는 걸 아는데 장보기를 하던 순간에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마음속에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영어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줄줄 외고 있는 것들이고 나도 살 수 있었는데.. 왜? 이유 없이 뭔가를 놓치고 산 기분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그 장보기와 식사 경험으로 나는 그 친구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지만 그보다 더 잘 알게 된 것은 장보기에도 서사와 연습과 철학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어떤 품목을 늘 갖추고 살고 싶은지, 그게 내 식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사실 가장 큰 제약처럼 보이는 예산보다 더 큰 제약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은 보이는 만큼 소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퍼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동안 앞에 있는 낯선 이의 바구니를 무심히 보게 된다. Divider를 놓을 시점을 찾는 게 가장 큰 이유이고, 언제든 내 차례가 올지 모르니 다른 것에 한눈을 팔 여유가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이다. 하나하나 올려놓은 물건에서 드러나는 계층적 문화적 배경은 너무도 적나라해서,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발가벗은 모습이려나 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장을 보는 것은 의미도 없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에,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선택된 물건을 바라보는 심정은 집에서 거울로는 볼 수 없는 내 자아를 다시 보는 것 같아서 늘 흥미롭다.
오늘 산 물건은 다음과 같다.
- 약한 탄산이 들어간 레드와인 (백포도주의 신맛이 부담스러울 때 이런 가벼운 적포도주를 차게 해서 먹으면 요즘 좋다.)
- 버터 크롸상 2개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여기서는 제대로 된 크라상을 구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는 버터를 넣지 않고 만든 것도 많아서 '버터' 크롸상이라고 꼭 쓰인 걸 사야 한다.)
- 파니르 (익힌 야채를 많이 먹으려고 냉장고에 인도 커리 페이스트를 장만해 둔다. 고기는 보관과 적정품 찾기가 까다로워서 대체재를 찾은 지 2달 만에 발견했다.)
- 마늘 (다 떨어짐)
-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다 떨어짐. 24개월 숙성이라 비싸서 망설였지만 작은 조각이 있어 그냥 삼.)
- 페페론치노 (매운맛을 생 고추로 내곤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숨이 죽어서 말린 것을 샀다)
자의식 과잉은 인터넷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보이니 나는 내 구매목록을 분석하는 것 같은 자의식 과잉 액티비티에 더이상 바이트(byte)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