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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달 Nov 23. 2023

입시 전야, 어른을 결심하다

8시20분부터 아이는 자고 있다. 아이의 대입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무이한 면접이 있는 내일을 위해서 아이는 일찍 잠을 청했다. 새벽 5시15분에 일어나서 20분에 출발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알람을 맞춰놓은 상태다.

자고 싶다고 그 시간에 잠이 들 수 있다니 나와는 참으로 다르다. 약 30년 전 학력고사를 앞두고 그 전날 잠을 설치고 너무 떨어서 시험도 보란 듯이 말아먹었던 나는 12년의 세월도 같이 말아먹었었다. 공부에 뜻도 없으면서 그냥 해야 하니까 했던 사람이었기에 탈출만이 목표여서 재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여러모로 다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잘 갈린 검처럼, 내내 준비해 왔다.

“이렇게 끝나다니 내일 어디서 불꽃놀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냐?”

그래, 나도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그간의 시간이 내일 시험을 위해서 모두 달려온 것처럼 내일 이후의 생활은 다르고 다르고 다를 것이다. 시간에 쫓겨 압박감에 쫓겨 마음껏 놀지 못했던 아이가 살아갈 인생은 내일부터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마음껏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시간도 제멋대로 쓸 것이다. 편안히 영화도 미술관도 가서 즐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도 기억하는 한 처음일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서조차 해야할 것들은 무수히 쫓아왔다. 누군가는 굳이 왜, 그러했냐 할지 모르지만 기질이다. 이건. 아이도 나도. 그런 걱정의 기질을 장착한 인간들이다.     

고입을 치룰 때는 꽤나 긴장했었다. 전날 잠도 설친데다 아침에 일찍 가서 먹은 삼계탕을 바로 화장실에 가서 개워놓고 새로 편할 줄 알고 착용했던 마스크는 계속 입에 달라붙어 구역질이 나서 시험에 집중할 수 없어서 정신이 혼미했다고 한다. 평소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 느끼는 아이를 걱정해서 하향지원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낭패였을 시험이었다.     

이번엔 결코 하향지원이 아니다. 후회없는 선택이 되기 위해서, 그간에 단단해진 아이를 믿기에, 배수의 진을 치기도 했기에 갈 수 있었던 길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도전하지 않아서 했을 후회보다 크지 않을 것이기에 신중히 오래 결정했다. 그리 많이 나는 떨리지는 않는다. 다만 새로운 마스크를 주어서 아이를 힘들게 했던 초보 엄마가 아니기 위해 내일 입을 옷을 한번 입혀본다던가 오늘 덥을 이불을 한번 덮어본다던가의 일들 정도는 했다. 아이에게 콧물을 비오듯이 나오게 하는 강아지는 언니네에 미리 맡겨두고 방의 온도를 살며시 들어가서 틈틈이 체크하고 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게 하기 위해 들어가보면서 기침이 나면 습도가 안맞나 싶어 수건을 적셔 넣어두면서 아이가 혹여나 나 때문에 깰까봐 심장이 콩콩 뛰기는 한다. 나는 오늘 밤을 새울 작정이다. 인생의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오늘 하루를 밤새지 않으면 언제 새겠는가 하지만 사실 다섯시에 일어날 자신이 없기도 하다. 반면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8시 이전에 잠이 들었다. 과연 몇시에 일어날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래, 운전할 당신 푹 자거라.     


밤 10시 20분 현재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며 아이들이 큰소리로 떠든다. 말이 되는가. 문을 닫아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들릴 만큼 큰 소리를 내다니. 관리실에 인터폰을 하는 것도 시끄러울 거 같아서 컴플레인을 하지 못한다. 밤중에 소리소문없이 강아지한테 공을 조용히 던져줄 때는 득달같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쫓아내던 경비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둔하디 둔하고 별로 궁시렁대지 않는 나이지만 이런 오감이 살아있는 순간에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은 분노로 바뀐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숙면이 된 이 시점에 말이다. 직접 나가서 경비아저씨를 불러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무릇 입시생 엄마의 자세인가. 고민이다. 10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상황종료.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까. 물론 아이가 기숙사를 간 이후 나는 매우 자유로운 시간을 선사받았다. 이주에 한번 나오는 아들을 위해 주말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나를 옭죄는 것이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를 위해 언제나 준비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아직은 내품에 있는 거 같다는 책임감, 나의 중요한 직업인 학부모가 아직은 유효한 중이라는 생각에 엄마로 복무하는 것의 비중이 매우 컸다. 하지만 이제 정말 날개를 달고 날아갈 아이의 발목을 잡지 않는 엄마가 앞으로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아이의 자립심을 위해서도 아이가 엄마를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그런 마음으로 아이 입시를 핑계로 22일동안 금주를 했다. 그간의 나와 작별하는 의식이었다. 생각보다 쉽다. 시시할 정도로 쉬운 일을 그동안 왜그리 못하고 아이 이름을 걸고서야 할 수 있었나. 나의 그 의지박약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고 술먹고 매번 끊기는 필름으로 인한 자괴감도 자연스레 안녕하니 오히려 매우 행복하다. 내일 봉인이 해제되지만 술에 의지하던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고 스스로에게 증명한 것으로 매우 만족스럽다. 절친을 잃은 것처럼 처음에는 허전했지만 맘에 안드는 친구 손절하듯 단호하게 떠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다르게 앞으로 살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지금 이 수간 모든 것이 감사하다. 어찌됐든.

너무나 따뜻하고 반듯하고 성실한 아들로 성장해준 것도. 다정하고 알아서 척척 일을 해결해주며 나를 아끼는 남편의 존재도. 먹고 싶은 것을 사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것도 어느 정도는 살 수 있는 지금의 상태. 크게 욕심부리지 않으면 불행하지 않을 수 있고, 미리 걱정하지 않으면 아직은 별일이 없는 상태. 싫은 사람 안 만나고 극소수의 좋은 사람들만 곁에 두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상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안 해도 되는 상태. 50이 사뭇 기대되는 이유다.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은 인생에서 겪어야 할 슬픔이나 이별들이 있겠지만, 이제 그것들과도 익숙해지면서 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까지 가는 과정에 소소한 행복과 크나큰 변화와 좌절들도 끌어안을 수 있는 어른이 되자.      

어른. 이제 그래 어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일단.

나이를 먹을수록 더 무겁게 멀게 느껴지는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다보면 할 것, 하고 싶은 것들도 따라오겠지. 아이와 마음껏 즐길 시간에 설레고 어른이 되길 꿈꾸는 오늘 밤. 아이의 숙면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이 순간. (방금 방에서 누군가 나와서 심장이 쿵...아들인 줄 알았는데 남편이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큰사람이 되어 결과도 기다릴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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