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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달 Sep 17. 2019

"무슨 엄마가 이래"란 말이 좋은 이유

쿨한 엄마가 될테야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란 드라마는 단언코 욕받이 드라마다. 세상에서 제일 진부한 엄마상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지 않고는 저럴 수 없다며 매회 비난을 위해서 보는 나도 참으로 악취미다. 이 드라마는 어찌됐든 희생적인 엄마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여기서 엄마는 딸들의 인생에 울고웃는 수준을 넘어서서 대신 살고 있다. 그녀는 완벽히 자식과 자신의 감정을 동일시하고 심지어 더 오버하고 있다. 이에 암에 결국 안걸릴 도리가 없을 만큼 퉁퉁 부은 얼굴로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매번 벽에 기대 괴로워 하는 모습을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큰딸에게는 나처럼 살지 말라면서 직장을 그만둔 것에 화를 내고(주부들에 대한 모욕이 아니던가!) 둘째딸에게는 자신이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왜 남편에게 말했냐며(그렇게 둘째딸에게 열등감을 그간 심어준 것은 아닌지) 질책하고 있다. 첫째딸의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비난하고 아이를 버리고 간 동서의 머리채를 틀어쥐는 것도 예사로 한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는 자식의 인생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서 그들의 삶을 항상 자신의 일보다 걱정하고 간섭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거구나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만다. 이렇게 나도 그간의 드라마를 통해 세뇌당해왔나 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도 있다. 좋은 엄마 컴플렉스는 이렇게 탄생한다.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교육과 미디어가 합심하여 강요하고 있다. 헌신적인 희생에 대하여 혹은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들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다니 하품이 나온다.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이런 세뇌 속에서 엄마란 존재는 너무 무시무시했다. 온전히 나를 바쳐야 하는 노릇이라니 애초에 발을 들이밀지 말아야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엄마가 그러지 않았음에 원망을 하기도 했던 거 같다. 항상 아이같은 모습으로 본인과 남의 시선이 중요하셨고 아들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시느라 나란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거 같은 모습이 싫어 좋은 엄마가 되지 않을 바엔 차라리 안하고 말겠어 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니 그건 전혀 아니였다.


나의 인생은 아이가 생기고 난 후와 생기기 전으로 나뉜다. 아이로 인해 도망칠 수 없는 책임감을 알게 되었고 무한한 걱정의 세계로 입문하였으며 내뜻대로 안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다. 이유를 알수없이 하루종일 우는 아이를 두고 뛰쳐나가고 싶었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으면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다. 15년 정도. 아이가 다칠까 전전긍긍, 마음이 다치는 것은 더 걱정. 나로 인해 아이의 인생이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인생 최고의 책임감 프로젝트다. 엄마로 산다는 건 근사한 일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독대해서 진짜 그래? 축복받고 근사하긴 하다만 대체론 책임감에 숨막히는 순간이 더 많지 않았어. 라고 묻고 싶다.  


아이는 중2 사춘기의 절정이라고 하는 나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의 사춘기가 반갑다. 이제 케어와 지도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 인격체로 대해도 될 나이가 되다니. 이렇게 편할 수가! 이만큼 키워놓으니 알아서 자신이 어느정도 판단하고 결정하려 한다. 책임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어 좋다. 아이가 화를 내면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엄마는 기분이 나뻐. 나도 너한테 똑같이 해줄테닷'라고 하고 '니가 알아서 해야지 엄마는 그냥 정보수집자일 뿐이야'라고 학원선택도 맡기고 혼자 몰래 무엇인가를 보면 '그래 너도 사생활이 필요한 나이야'라고 하며 조금씩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희생적이지 않는 것도 얼마나 힘든일이던지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계란말이는 여전히 아들 입으로만 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런저런 나만의 영역들을 만들며 아이에게 쏟는 관심과 집중을 걷어들이니 조금은 가능하게 되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마냥 모든 것이 마음에 들까. 당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다른 것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잔소리귀신이 들러붙은듯 입이 마구 나불대고 싶었지만 참았다. 웹툰을 몇시간씩 보고 있는 것도 웹툰 작가가 되려는 거야 소리치고 싶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리는 것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냥 자식이라기보다 자신의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대하다보니 아이는 그런 관계의 전환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눈높이로 맘에 안 드는 것에 대해 같이 욕도 하고 힘들면 그 학원 때려쳐 하고 악마의 속삭임도 하니 아이는 히죽거리며 "무슨 엄마가 이래, 전형적인 엄마스타일이 아니잖아"라고 한다.  그 어떤 말보다 듣기가 좋았다. 이제 더이상 자애롭고 옳은말만 하는 어른이 아니여도 된다니. 무엇인가 매번  찾아달라고만 안하면 계속 인내심 많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쓰고나니 쿨한 엄마 코스프레같다. 어디까지나 좌절과 결심이 반복되는 와중에 지향점이라고 해두자. 아직도 아이에 대한 걱정은 산을 이룰 정도로 많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걱정은 걱정의 자리에 그냥 둘 수밖에.


사실 나도 다른 의미로 속으로  '뭐 엄마가 저래. 너무 다르잖아'라고 했다.  듣고배운 대로라면 무한의, 무조건의 애정을 마구 쏟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라며 오랜 세월 토라졌다. 나에겐 전형적인 엄마에 대한 기대 같은 게 있었나보다.  이젠 그냥 허덕허덕 아이 넷을 키우느라 어른인 척 살아가시던 철부지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다만 마음을 숨기지 못하셔서 아들에 대한 사랑을 적나라하게 들키셨던 것은 그러지 말지 그랬어 싶다 지금도.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를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엄마가 되어보니 더욱 이해하기 힘들지만 한 사람으로서 이만큼 나이가 들어보니 이해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런 무심함으로 인해 나의 인생이 간섭받지 않은 것은 행운이다.  간섭보다는 무심함이 그나마 낫다. 그래도 미안하지만 나는 엄마 같은 엄마 아니라 다행이야 라고 보통의 드라마같지 않은 대사를 할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엄마가 되기 위해 그래서 힘껏 애썼다. 간섭하지 않으면서 든든한 빽이 되어야 하고 사랑하면서 희생적이지 않아야 하 엄마노릇을 하려는 것도 결국 또다른 나만의 엄마컴플렉스일까.


이렇게 사랑으로 키워놔도 언젠가는 나쁜 기억들만 쏙쏙 편집해서 엄마를 원망할 테지. 대부분 자식은 부모 못마땅하단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술만 많이 먹고 게으르고 뭘 물어봐도 나는 몰라 하던 엄마라고 기억해도 어쩔 수 없지. 엄마가 사랑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내는 빛을 가졌으면 좋겠다.  엄마로 산다는 건 어차피 완벽히 밑지는 장사다. 허나 꼬물거리던 강아지 같던 무기력한 존재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보는 것은 스펙터클한 영화보다 나한테는 극적이니 그것으로 똔똔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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