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2023.01.10(화)
- 자, 보세요, 이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초록색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에 한 덩어리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부분이 있지요. 커다란 물고기 떼가 바다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파도 사이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작은 파도가 모인 것에 지나지 않답니다. 눈에는 비치지 않지만 때때로 저렇게 해면에서 빛이 날뛰는 때가 있는데, 잔물결의 일부분만을 일제히 비추는 거랍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마음을 속인다, 고 아버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환상의 빛> 中)
'삶은 OOO다'라는 비유를 우리는 자주 접하는데요. 마라톤, 여정, 영화 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환상의 빛>을 읽고는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소소기의 바다처럼, 빛 아래 아름답고 잔잔해 보이는 누군가의 인생도 실상은 어둡고 차가운 심해를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 속 유미코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후,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징조도, 유서도 없었기에 유미코는 의문과 분함을 가슴 한 곳에 품고 계속해서 삶을 살아나갑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마치 숙제처럼 남아서, 그녀는 아른거리는 남편의 뒷모습에 종종 말을 걸곤 하는데요. 역설적으로 이것이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윽고 유미코는, 남편이 '혼이 빠져나가서' 죽은 그날밤 어쩌면 환상의 빛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해답을 내려버립니다. 이 해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환상이지만, 유미코는 아마 그 환상에 기대어 이제 남은 생을 또 살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사건들도, 그저 조금 떨어져서 보면 내 인생을 조각해나갈 때 어딘가의 일부로 쓰인다는 게 새삼스럽습니다.
삶이 소소기의 바다라면, 앞으로도 저는 아름다운 바다를 유지하기 위해 저만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잔상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나아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세계는 다른 사람이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타인의 바다에서 반짝이고 있는 그 빛들을 저 또한 절대 온전히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서로의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응원할 뿐이죠. 불가해한 생이지만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
그곳에서 유영하기 위해서는, 환상과 더불어서 나를 지탱하는 현실의 물결도 많이 만들어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나에 대해 계속 탐구하는 것. 크고 작은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이행해나가는 것. 쌓여가는 생각을 틈틈이 적어두는 것. 새로 나온 만화책을 읽는 것. 퇴근 이후 삶을 지키는 것. 여행을 훌쩍 떠나는 것까지. 분명하고 견고한 현실이 결국 내 바다의 빛과 물결을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리라 믿습니다.
모두에게, 언제나처럼 유이치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요.
올해도 잘 부탁합니다.
*위 글은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에서 발췌한 구절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