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그림책 작가들, 일러스트레이터들 보세요
SCBWI (어린이책 작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겨울 컨퍼런스에 참가하게 돼서, 오고 가며 보기만 했던 뉴욕 미드타운의 힐튼 호텔에 다녀왔다. 너무 보고 느끼고 온 게 많아서 좀 정리하고 싶어졌다.
일단 대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지만 그 당시엔 동화책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야 말겠어- 같은 집념도 큰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동화책 수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깨달음이 없었다. 수업도 그림을 그리고 다루는 방식을 알려주는 거지 시장에 대해서는 미미한 언급뿐이었다.
처음으로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배웠다. 동화 시장이 어떤지,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지 등,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불면증이 오기도 했다. 내가 정말 자도 되는 걸까, 잠을 잘 가치가 있는 사람인 걸까.....
그런 의미에서 다녀오길 정말 잘했던 이번 겨울 컨퍼런스. 아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아트디렉터와 편집자들과 만나서 소개하고 대화하고, 이전 회사의 식구들, 새로 알게 된 멋있는 작가들까지 정말 목이 아플 정도로 웃고 떠들다가 왔다. 무엇보다 동화책 시장에 대한 트렌드 이야기나, 계약서, 에이전트, 출판 마케팅, 소셜 미디어 이야기 등 집에서 계속 혼자 생각해 봤자 해결되지 않는 대화 주제들을 터놓고 이야기하니 너무 속 시원했다.
에이전트 얘기는 언제나 정리해서 써둬야지 하고 미뤄두기만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정리해 봐야겠다 싶었다. 컨퍼런스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이거는 꽁꽁 숨겨둘 이야기가 아니잖아?' 에이전트 얘기는 예민하고, 개인적이고, 어딘가 비밀스럽다. 지난번에 Gatekeeper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에이전트는 왜인지 그 정도로 조심스러운 존재다. 처음 내가 에이전트와 일하기 시작하면서 고민을 가졌을 때 누군가가 이야기해 줬으면 들었을까 싶지만 어디에선 대화가 계속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이전 브런치에서 말했지만, 에이전트는 필수가 아니다. 그렇지만 있으면 좋을 수 있다. 출판 관련 일러스트, 특히 그림책(Picture Books),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s), 미들그레이드 (Middle Grade, 8-12세 아동도서) 같은 쪽의 작가/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면 있으면 특히 크게 도움이 된다. 에이전트는 나를 야무지게 세일해 주는 딜메이커로, 나를 더 큰 시장에 (예를 들어 북미 시장) 진출시켜 주는 일을 할 수 있는데, 게다가 같은 나라에 살지 않더라도 요즘엔 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에이전트를 잘 만나면 큰 해외 출판이 가능해진다. 내가 혼자라면 닿지 않는 컨택들에게 내 포트폴리오를 보여줄 수 있어서 더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따낼 수도 있다.
너무 환상적으로 들리지만 우리 일러스트레이터에겐 더 더 더 중요하게 알아둘 것들이 있다. 에이전트만 구하면 모든 게 탄탄대로 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에이전트와의 관계는 결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선택이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놓고 가만히 생각해 봐도 많은 고민들이 해결된다.
너무 결혼하고 싶어서 조건만 맞는다고 결혼을 하면 재미도 케미도 없는 평생을 보낸다. 나 좋다는 사람이 이 사람 밖에 없는 것 같다는 불안감에 덥석 결혼해 버리면 나중에 불만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불행해진다. 급해서 적당히 괜찮은 사람을 찾아서 결혼해 버리면 적당히 괜찮기만 한 생활로 이어진다. 나 혼자는 불안하니까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하는 홀로서기 불가능한 상태로 하는 결혼은 또 복잡 미묘하게 고단하다.
나 혼자서도 잘해야 함께해도 잘할 수 있는 거 우리 자존감 트렌드가 휘몰아칠 때 잘 배웠다.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지,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는지, 조건도 아주 잘 맞는지. 신중 또 신중 또 신중. 에이전트도 결혼 상대처럼 조급해하지 않고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지보다 특히 고려하거나 피해야 하는 점들을 아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몇 가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써봤다. 컨퍼런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또 배웠다. 정말 이상하게 운영 방법으로 떳떳하게 존재하고 있는 에이전시들이 생각보다 꽤 많으니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이혼은 여러모로 스트레스받는 일이니 미리 피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주관적입니다.)
1. 에이전트가 몇 명인지 확인하자. 그리고 한 명이서 몇 명을 담당하는지 확인하자.
Illustration Agency라고 구글에서 검색하면 대형 에이전시들이 주르륵 나온다. 일러스트 에이전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딱히 아니다. 아티스트가 100명이 훌쩍 넘어가는 에이전시엔 아마 에이전트가 여러 명 있을 텐데, 각자 몇 명을 담당하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한 명의 작가를 한 에이전트가 담당하는 게 아니라 (담당자가 있는 이게 스탠다드) 한 에이전시 안의 여러 에이전트가 한 명을 돌려가며 홍보할 수도 있는데, 이건 작가를 Represent 하는 게 아니라 작가를 하나의 이미지, 스킬, 짤(?)로 보는 Red Flag 일 수도 있다. 경험해 봤는데 뭐 상관없겠지-하다가 나중에는 좋지 않았다. 이래서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추가로 에이전트 한 명이 50명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면 어떻게 모두에게 충분한 어텐션이 가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소규모 과외가 왜 비싼지 잘 생각해 보자...
2. 일러스트레이터를 "Client"로 대하는지, 상하관계를 생각하는지, 작가들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하기.
내 경험에 좋은 에이전트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수입에 따라 본인이 수입이 달라지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작가들을 더 크고 좋은 딜을 가져오고 작가로서 성장하도록 돕고 함께 일하는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위에서 말한 작가를 이미지로 대하는 대형 에이전시는 많은 작가가 있어서 '대형'이라고 불리는데, 여러 포트폴리오 이미지를 돌리고 클라이언트가 하나를 고르면 작가가 누가 됐건 자신이 수익이 생기는 시스템이니 딱히 특정 일러스트레이터의 성장에 크게 관여를 할 필요가 없다.
Literary Agency는 흔히 작가들을 "Client"라고 부르지만 Illustration Agency는 그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에이전트는 오래 동안 함께 일할 사람이니 일러스트레이터-에이전트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추가로 나는 트위터에서 얼마나 말을 많이 하고 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확인해 본다.
3. 에이전시의 회사 정보를 확인해 본다. 에이전트의 회전율, SCBWI 등 공개적으로 활동하는지 확인해 본다.
Glassdoor, Google, SCBWI, Publisher's Weekly 등에 에이전시/에이전트를 검색해 본다.
예전에 글라스도어에서 엄청난 코멘트를 봤는데 그게 팩트여서 큰 도움이 됐던 기억이 난다.
Publisher's Marketplace 나 Publisher's Weekly에 검색 결과가 적당히 나오면 좋고 아예 나오지 않으면 별로거나 엄청 강력한 사람이라는 말도 풍문으로 돈다.
여기서부턴 계약 후 조심해야 하는 Red Flags 다. 에이전트가 내 작업을 좋아하고 내 포텐셜을 봤다니.... 나는 너무 좋아서 울었다. 그렇지만 눈물 뚝 그치고, 확인할 일부터 해결하고 모든 게 좋아 보이면 그때 울음이든 샴페인이든 터뜨려도 좋다.
4. 계약서를 받은 후 이게 보인다면 의심하자: "에이전시와 계약 종료를 한다고 말한 후 6개월 동안 우리와 관계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 "우리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을 때 진행한 프로젝트에 대한 작업의 파생 프로젝트는 계약 종료 후 시작하게 되더라도 다음 5년 동안 우리가 모두 담당하고 커미션을 가져가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건 주로 아무 말이나 한다는 걸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작가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못 알아듣겠으면 주변에라도 물어보고 어디든 도움을 청하고 꼭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계약 종료를 원할 때 원래 일반 직장인은 2 Weeks' Notice라고 하는 걸 보내고 2주 후 퇴사를 한다. 그런데 일러스트레이터는 6개월이나 기다리고 나가야 한다니. (나가지 말라는 말인 것 같다.) 계약서를 받았을 때 이런 조항이 보인다면 3개월로라도 바꾸자고 무조건 이야기해봐야 한다. 사실 *좋은* 에이전트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마무리하자는 약속을 하고 그대로 보내준다.
게다가 무려 계약 종료 후 5년이나 커미션을 가져가겠다고? 주로 일러스트레이터가 에이전시와 계약 종료하는 이유는 커미션이 아깝다고 생각이 들어서인데,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불공평해지기 딱 좋은 조항이다.
5. 모든 시장을 올인원으로 관리하는 Worldwide 일러스트레이션 에이전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돌아와 강조할 부분은 꼭 에이전시를 찾기 전에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작업을 하고 어떤 시장에 집중해서 일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건 모든 결정을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면 에이전시를 찾기 전에 직접 프로젝트를 찾아서 먼저 해보는 걸 추천한다. 아무런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에이전시부터 찾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나는 출판도 하고 싶고, 광고도 하고 싶은데 둘 다 관리해 주는 곳이 있네! 하면 기회다 싶어 계약을 해버릴 만 하지만, 출판 클라이언트는 에이전시를 통해서 들어오지만 광고 일은 나에게 직접 들어오는 경우가 훨씬 많으면 나중에 불공평하다고 느끼기 쉽다. 왜 불필요하게 에이전트에게 광고 일까지 커미션을 줘야 하나 싶을 것이다.
계약서가 어렵고 무섭지만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다. 계약서가 복잡해서 에이전시 맡겨버리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이해하지만 건강한 에이전시-작가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또 에이전트를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보고 바라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올인원 월드와이드 에이전시가 끌린다면.... 월드와이드 클라이언트의 언어 (한국어, 중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어, 스웨덴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태국어 등 - 영어가 공용어지만 수월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로 소통은 어떻게 할지, 환율과 환전, 세금, 시차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하며 일하는지, 그리고 내가 직접 가져온 내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는 커미션을 0% 에서 기준보다 훨씬 적게 변경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맘에 쏙 드는 계약서로 변경했을 때만 서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6. 오피스가 여러 곳에 있다고 하는 에이전시들, 정말 활성화되어 있는 오피스인지 확인해 본다.
긴말 없이... 거짓말이 하나둘 있는 곳엔 백 개의 거짓말이 있는 법이니. 우편 주소, 구글맵, 로컬 협회에서 활동을 하는지 등 여러 방법으로 확인해 본다. 뉴욕 오피스 있다고 광고하고 뉴욕에 없고, 뉴욕에 커넥션도 없고, 심지어 시장을 잘 모르고 있는 국제 에이전시도 많이 봤다. 나는 개인적으로 뉴욕 시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원했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했다. 조심 또 조심.
조심해야 하는 점만 늘어놓아보니 의심만 넘쳐나는 정 없고 타락한 시장 같지만, 나는 나름 요즘엔 확신과 희망에 차 있는 상태다. 내 편이 아닌 사람도 많지만 내 편인 사람은 더 많다. 진심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많고 우리 다 같은 편이고 다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불순물을 걸러내고 남은 투명한 물을 보면 을매나 기분이 좋게요?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자기의 위치를 낮추고 언제나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백 가지의 타협을 해야 하는 걸 보면 속상하다. 컨퍼런스에서 만난 에이전트가 해준 말이 맴돈다. "작가들이 있어서 우리가, 편집자들이, 오늘 온 모든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수고를 늘 후려치기만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참 많다. 그러니 어디서 이상한 걸 잘못 배운 사람들은 다시 잘 배워올 때까지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좋은 사람들 곁에 두고 더 배우고 더 발전하면서 오래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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