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
일러스트레이터로 처음 시작했을 때는 피드백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긴장됐다. 스케치나 컬러 작업을 끝낸 후에 생각을 떨쳐 버리자고 더 과한 노력을 했다. 정리하자는 마음에 시작한 청소가 모든 장비를 두르고 온 집안을 헤집어버리는 대청소가 되어버리거나, 급하게 친구를 불러서 놀고 자극적인 영화들을 정주행 하는 등, 세상의 여러 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피드백을 기다리는 긴장감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뭐가 그렇게 걱정됐던 걸까. 내 그림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고 느끼면 어떡하지?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하면 어떡하지? 욕하면 어떡하지? 내가 쓴 글에 문법을 틀렸으면 어떡하지? 내가 중요한 정보를 잘못 이해했으면 어떡하지? 어떤 부분을 깜빡했으면? 내 이메일을 친절하지 않다고 느꼈으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혹시나... 내 커리어가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면 어떡하지?
그렇게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다른 생각들로 방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은 그래도 익숙해진 건지, 자연스레 자존감이 높아진 건지, 그냥 어른이 되면서 담담해지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환경도 마음도 많이 바뀌게 되면서 여유가 생긴 요즘, 그렇게나 손에 땀을 쥐게 하며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없어져서 신기하기도 하다.
요즘 피드백을 기다리는 그 시간에는 정보를 욱여넣기보다는 그냥 재밌는 일을 한다. 우선순위 일 번은 모니터에서 멀어질 것. 하루의 반은 디지털 툴로 작업을 하고 나머지 반은 컴퓨터로 이메일을 하고 다른 업무를 보내다 보니 눈도 어깨도 허리도 너무 피곤하다. 그러고 짬나는 시간 동안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쉬다 보니, 눈 건강은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서 붕 뜨는 시간이 생기면 무조건 물감을 손에 묻혀가고 종이를 만지고, 일어섰다 앉았다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면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는 산책을 한다. 모두 모니터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두 번째는 청소. 이 때다- 라는 마음으로 청소를 한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과한 대청소는 그렇게 자주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이렇게 짬날 때마다 정리와 청소를 하면 말이다.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빨래도 하고, 질서 없이 물건들이 늘어져 있는 찬장과 서랍장을 정리한다. 이게 내 머릿속이다, 마음속이다… 하면서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청소를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한창 달리는 기간에는 여러 번 늦은 새벽에 잠에 들게 되는데, 바쁜 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일어나게 되는 그런 날을 나를 보살피는 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만족해주느라 차암 열심히도 산 나 자신을 위해 정리 정돈을 하고 휴식을 취하는 날.
지나고 나니 긴장해봤자였다. 어차피 피드백은 금방 알게 될 것. 어차피 곧 듣게 될 내가 모르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예상하면서 불안해하고 있어봤자다. 예방할 수 없는 일은 나중에 삐끗하는 순간이 올 때, 그때 침착하게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하면 된다. 그런 순간은 높은 확률로 아예 존재하지 않을 상황이기도 하다.
오늘은 뒤죽박죽 되어있는 색연필을 정리했다. 찾기 쉽게 색깔별로 정리하고, 뭉뚝한 것들은 깎아두고, 정리하는 김에 옆에 있던 연필들도 예쁘게 깎아뒀다.
::221102 1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