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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강 Cindy Kang Jul 15. 2023

그래도 역시 아날로그

디지털 아트 세상에서 아날로그를 외치다

AI Generated Art 가 정복해 나가고 있는 요즘 말도 안 되게 점점 아날로그를 향해서 몸과 마음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 나야 나... 출판된 작업물 전부가 디지털 작업인 내가, 매일매일을 모니터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몇 년 전, 진지하게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쯤 썼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유화를 열심히 하(다가 접)던 학생이었고 디지털 작업물로만 포트폴리오를 처음 만들게 되었을 때였다.


"그림책 작가들은 수채화를 써야 하니까 나는 그림책은 안 되겠다."


또 이런 글도 적었다.


"디지털 작업이 아니면 클라이언트들이 외주를 맡기지 않는다."


누군가 정한 법도 규칙도 아니지만 나는 이런저런 데이터를 모아서 저런 문장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노트에 적음으로써 꼭, 꼭 기억하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래서 결국 저 말들이 맞았던가? 뭐,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유화에 더 익숙했던 나는 물감의 질감이 잘 드러나는 디지털 페인팅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면서 내 포트폴리오는 "실제 페인팅 같은 디지털 아트"가 되었다. 간혹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뭐로 그렸냐며 궁금해할 때 기분이 좋았다. 진짜 같죠? 이거, 컴퓨터로 그렸어요~ 대답하면서 나는 물감을 다루는 스킬과 디지털 스킬 모두를 갖춘 전문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름 길을 잘 텄다고 생각했다. 물론 매일 고민과 걱정은 있었지만 나름대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에 있는 느낌이 참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도시에 살면서 시골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 군중 속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 시크하지만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뉴욕 지하철에서 유키오 미시마의 봄눈을 읽는 사람, 농담을 좋아하지만 놀리는 건 싫어하는 사람. 뭐 그런 적당히 모순적인 나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디지털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 특유의 자로 댄 듯이 격자에 맞는 구도와 깔끔한 선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하지만 난 어차피 그걸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진짜 붓처럼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포토샵 브러시를 찾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압박이 줄었다. 게다가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두니 나에게 무리하게 깔끔한 선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내 생각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었다. 첫째로 내가 왜 디지털을 하게 되었더라? 하고 질문해 보게 됐다. 디지털의 가장 큰 장점은 1) 작업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2) 수정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3) 내가 종이나 캔버스 위에 작업할 때 용기 내지 못했던 것들을 디지털로 용감하게 추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디지털 툴은 일러스트 외주를 받는 것에 있어 최적합했다.


혼자 이 질문을 하고는 기분이 조금 꽁기해졌다. 나는 외주를 하기 위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던가?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깊은 질문의 늪으로 빠져버렸다. 나는 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더라? 일러스트레이터가 무슨 직업이더라? 나.... 뭐 그리는 걸 좋아하더라? 디즈니 픽사의 소울에 등장하는 조와 22처럼, 문득 목적의식이 희미해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와중에 매거진의 인터뷰 제안을 하나 받게 됐다. 보내주신 질문지를 읽어보니 자주 받는 질문들이길래 크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질문에서 잠시 멈췄다.


"작가님만의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만의 작업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 게 가장 좋을까요?"


아, 분명 자주 듣는 인터뷰 질문인데 갑자기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어딘가 불편하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현재 하는 작업이 범위가 넓어서 내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건가? 그냥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가? 음... 잘 모르겠어요!!!! 


한참을 머리를 굴려보다가 문득 내 변화를 깨달았다. 대학교 시절에도, 레지던시에서도, 컨퍼런스에서도 매번 핫토픽인 회화 작가(artist, fine artist)와 일러스트 작가(Illustrator)의 차이가 떠올랐다. 이 둘의 구분은 사실 어렵지 않다. 회화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 감정, 기억, 생각, 주장 등을 표현(expression)을 하는 사람들이고 일러스트 작가는 어떠한 텍스트의 목적 달성을 위한 해결책(solution)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내 일러스트는 외주작업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기 위해 대부분 디지털 툴로 만들어졌다. 그게 아무리 진짜 물감을 사용한 그림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디지털 브러시는 내가 클라이언트의 상품이나 텍스트를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하거나 그 의미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을 기한 내에 빠르게 그려내고, 사람들과 수월하게 협업을 하기 위한 목적에 쓰인 도구인 것이다. 




내가 느낀 변화는 내가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뭐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조금 알 것 같다.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시간만 나면 공상에 빠지고 재밌는 생각만 떠올리는 나에게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궁금한 이야기가 너무 많고, 책도 영화도,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자연스레 일러스트레이터뿐 아닌 내 이야기를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게 선명해진 순간이 왔다.


인터뷰 답변을 준비하면서 내가 만약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춰 짧은 마감 기한과 수정 여부나 속도에 내 작업을 가두지 않는다면 어떤 작업을 하게 되는지 생각해 봤다. 실수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덧칠을 할 수 있다면, 빠르게 끝내지 않아도 되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가장 나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혹은 디지털의 최장점인 *빠르게, 수정 가능*을 살려서 모든 구상과 색상 계획을 마쳐 그림을 완성하고 그걸 종이로 옮기는 건? 그게 좌절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까?




그래서 해봤다. 


www.cindysyk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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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디지털로 마음에 들 때까지 그림을 완성했다. 혼자 적당한 데드라인을 설정해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라이트 박스로 종이에 스케치를 옮겨서, 내 디지털 작업물을 레퍼런스로 삼아 실제 물감으로 컬러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완성했다. 


울컥했다. 완성해놓고 보니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오래 앓고 있었던 무언가가 해결된 느낌에 후련했다. 내가 유화를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몇 년을 디지털 100%로 그림을 완성하다 보니 갈증이 있었나 보다. 자세히 보면 완벽하지 않는 붓터치와 구불구불한 선들마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원래 그런 완벽하지 않은 선들과 표현을 좋아하는데, 디지털로 아예 불가능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저냥 만족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확실히 다르고, 내가 그린 아이들마저 그림 속 세상에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작업 책상의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디지털 작업의 인쇄물과 다르게 느껴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디지털 툴도 하나의 미술 재료라고 생각한다. 혼합재료처럼 물감과 함께 사용할 수도 있고, 스케치나 스터디하는 과정에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손때 묻은 작업에게 생기는 이 마음을 디지털 100%인 작업은 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게 내 진심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내 가치관과 내 성격과 내 이야기, 또 내가 만든 세상과 내 캐릭터들을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게 조금은 어설프더라도 실재하는 종이 위 그림인 거다. 내가 몇 시간, 며칠 동안을 고군분투 한 종이 위 그림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닮아 있다.


딱히 디지털화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것들도 디지털화가 되어가는 마당에 시대착오적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씁쓸하지만,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가능하다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떻게 더 잘 표현할 것인지에 집중하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것.


나는 역시 효율과 편의가 최우선이 아니더라도 천천히 정성 들이고 마음을 담은 아날로그의 것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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