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디강 Cindy Kang May 26. 2020

왜 하필 뉴욕인데? (2)

이 곳의 낭만은 빨간 일회용 컵에 값싼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것



앞서 말했듯이 뉴욕은 지저분하다. 대도시인 것에 비해 많은 것들이 낡고, 후지고, 더럽다. 대단한 사람들이 많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거운 렌트비에 허덕이며 살고 있고, 꿈을 위해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아끼며 생활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드라마나 여러 소셜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를 통해서 화려한 뉴욕에서의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퇴근하고 연인과 친구들과 화려한 맨해튼의 밤거리가 보이는 와인바에 앉아서 재즈를 들으며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Christmas in Brooklyn, Cindy Kang, 2018.


낭만이라는 게 뭔지 아빠와 이야기해본 적이 있다. 미슐랭 스타를 달고 화려한 플레이팅의 코스 요리와 고급 와인을 대접하는 레스토랑에서의 데이트는 더 말할 필요 없이 로맨틱하고 럭셔리하다. 하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 속 낭만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놓고 왔다며 얼굴 찌푸리기보다 친구와 푸하하 웃으며 지하철 역까지 뛰어가는 것. 날씨가 너무 좋아 예정에 없던 공원 피크닉을 하는 것. 돗자리 대신 대충 겉옷을 벗고 그 위에 누워 움직이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 남은 동전들을 탈탈 털어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것.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몬탁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비스듬히 다리를 올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생각난다. 그들의 모습이 반듯하진 않더라도, 남 눈치 보지 않고 그 둘은 진심으로 웃고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낭만은 주어진 상황에서 행복을 찾는 일인 것 같다. 물론 행복을 위해 화려한 것들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걸 내 앞으로 가져오지 못한다고 해서, 그 멋있는 곳에 못 간다고 해서 낭만을 못 찾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뉴욕에 처음 갔을 때 여전히 고등학생 티를 한껏 묻히고 거리를 활보했던 나는 한 계절이 지나고 즈음 굉장히 위축돼 있었다. 나는 뉴요커 언니들처럼 주말마다 소호에 쇼핑을 가고, 한쪽 어깨엔 핸드백을 매고 한 손엔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높은 힐을 신고 어딘가 바쁘게 가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이 어설펐던 생각이 참 우습기 짝이 없다. 일단 나는 디폴트 집순이여서 주말에 조용히 집에 있는 게 행복이었을뿐더러, 그때의 내가 생각한 낭만은 미치도록 아름답고, 바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Talk, Cindy Kang, 2017.



기분을 내자고 친구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코스 요리를 먹었다. 이 레스토랑은 유명 잡지에도 실리는 곳이었고, 영화에도 나왔다고 한다. 가기 전날 밤부터 설렜다. 아니, 예약하는 순간부터 설렜다. 좋아하는 옷을 입고, 보는 것도 행복한 식사를 하고, 와인 두 잔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집에 돌아왔다. 그 날은 길거리의 사이렌 소리와 빵빵 거리는 화난 택시의 소리도 그 저녁엔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기절하고 일어난 다음날은 집에서 라면 끓여 먹었다. 미국으로 수입된 너구리는 다시마가 들어있지 않아 잠깐 속상했지만 여전히 국물이 끝내줬다. 저녁 때는 움직이기도 귀찮아 대충 두부 반 모만 끓여 먹었다. 그 전날 밤과 갭이 클 수는 있지만 내가 갑자기 궁상맞아지거나 "불행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한 이틀을 보낸 것뿐이다.



토요일 오후의 브루클린 공원.




비에 쫄딱 젖으면 어때, 하이힐 좀 안 신으면 어때, 좀 추우면 어때, 좀 더우면 어때. 




이전에는 "뭐 어때, " 하는 게 괜찮은 지 잘 몰랐다. 혹시 머릿속엔 있었더라도 정말 행동으로 옮겨도 되나 싶었다. 취미와 특기가 계획하고 미리 준비 하기인 나는 "뭐 어때"의 마법에 동의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 몇 계절을 보낸 후 나는 이제 계획을 하더라도 어차피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게 대부분인 걸 안다. 계획대로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많고, 소위 말하는 정석 코스를 따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알면서도 난 여전히 끄적끄적 미래를 준비한다. 미리 걱정하거나 슬퍼하고 가끔은(자주) 미리 김칫국 축배를 들기도 한다. 다행인 건 예전만큼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 창문으로 들이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실수로 커피 우유가 돼 버린 라테를 마시며 난 나만의 낭만을 즐긴다. 나름 이 맛도 나쁘지 않고, 날씨 좋은 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더 중요하다.








행복을 위해서는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질 필요는 없다.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황무지에서도 내 마음가짐에 따라 내가 있는 곳이 꽃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이런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도 감사하고 감동할 수 있게 만든 건 뉴욕에서 알게 된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조용한 서울의 집이지만, 그때의 따뜻한 커피 우유를 생각해보니 어디선가 시끄러운 뉴욕의 사이렌 소리와 거리의 소음이 들리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하필 뉴욕인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