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1) 백색 인종에 속하는 사람. ≒백색인. (2) 날 때부터 살과 털빛이 아주 하얀 사람.
행세하다(行世하다)
「동사」(1) 세상에서 사람의 도리를 행하다. (2) 처세하여 행동하다. (3)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떤 당사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행동하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넬라 라슨의 『패싱』국문 번역본은 '패싱(passing)'을 ‘백인 행세하기’로 번역했다. ‘백인 행세하기’의 뜻을 풀어보면, ‘백색 인종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백색 인종에 속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글에서는 국문 번역본의 제목인 '백인 행세하기'라는 표현이 타당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2. 'passing'에 얽혀있는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소설 속에서 드러난 ‘패싱’은 비단 인종주의뿐만 아니라 계급주의와도 긴밀하게 얽혀있다. 그런데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어는 오직 인종주의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반영하며, 계급주의에 관한 내용은 포섭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패싱』은 아이린과 클레어가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이야기다. 두 사람의 상성은 가히 파괴적이다. 종국에 아이린이 클레어를 살해한 것이 암시되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친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욕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들의 욕망을 찬찬히 뜯어보면, 인종주의와 계급주의에 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보인다.
클레어는 크게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먼저, 클레어는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이 있다. 클레어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저소득층 흑인 여성이지만, 상류층 백인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신분 상승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클레어는 흑인사회와 단절하고 백인으로서 패싱했다.
다음으로, 클레어는 흑인 사회로 복귀하기를 욕망한다. 클레어가 남편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이다. 클레어의 남편은 인종차별주의자다. 이에 맞추어 클레어는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한다. 가령, 남편이 클레어와 아이린의 앞에서 흑인에 대한 폭력적인 언사를 할 때도 클레어는 그의 말에 잠자코 동의했다. 클레어는 흑인으로부터 나고 흑인 사회에서 자랐음에도 자신이 해당 사회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조금의 감각마저 지우며 살았다. 예컨대,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자신이 출산할 아이가 어두운 피부색을 지녀서 자신의 정체가 남편에게 탄로 날까 봐 걱정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연유로 클레어는 흑인사회로 복귀하려고 한다.
아이린의 욕망은 안정감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집약된다. 그런데 아이린의 욕망이 드러나는 양상은 클레어의 그것보다 복합적이며, 모순적이다. 아이린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흑인사회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백인으로서의 패싱을 적절히 혼용한다. 가령, 아이린은 흑인 인권운동 단체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흑인이 겪는 사회적 차별을 인식하지 않으며 자라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바람은 사회적 차별을 왜곡된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데서 기인한 것 같다. 거리에서 흑인이 린치당하는 사회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차별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아이린은 자신이 패싱된다면, 생활하기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린과 클레어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소는 흑인은 출입이 불가능한 백인 전용 호텔이었다. 아이린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패싱되기를 자처한다. 이와 같은 아이린의 행동은 자신을 흑인사회라는 문화적 기반으로부터 타자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린이 무너지는 순간은 안정감이 무너질 때다. 일례로, 아이린과 남편의 관계를 뜯어보면 이러한 장면이 보인다. 아이린은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중산층 흑인 여성으로서 계급성의 편의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반대로, 그의 남편은 차별적인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브라질로 이민을 하고 싶어 한다. 아이린은 이러한 남편의 성향을 두려워한다. 남편의 모험적인 기질은 언제든지 자신의 계급성을 추락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아이린은 불안정한 성향을 지닌 클레어를 의심하고 꺼린다. 클레어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면 흑인에서 백인으로, 백인에서 흑인 사회로 얼마든지 편입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추진력이 대단하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흑인 사회로 편입하기 위해, 자기 남편을 차지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즉, 클레어는 존재만으로도 아이린의 계급성을 위협한다. 아마도 아이린은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클레어를 죽였을 것이다.
3. ‘흑인’과 ‘백인’ 경계의 모호성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어가 성립하려면, 주어인 ‘백인’의 범주가 명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어처럼 행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백인의 범주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작가의 답변은 아니오,이다. 가령, 아이린이 클레어를 호텔 카페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는 클레어를 처음에 명백한 백인으로 오인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인종에 따른 생물학적인 본질이 존재한다는 일련의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는 파이퍼와 아이린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파이퍼가 자신은 흑인들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클레어의 존재가 파이퍼의 믿음에 대한 반례가 되어 준다. 흑인의 범주가 모호한 것처럼 백인의 범주 또한 모호하다. 인종을 구별 짓는 본질적인 요소, 비본질적인 요소는 없다.
4.'패싱한 것'인가, '패싱된 것'인가?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어가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이유로는, 아이린과 클레어가 정말 자신의 의지로 백인 ‘행세’를 한 것인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아이린과 클레어가 패싱된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해서도 소설 속에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백인이 흑인으로 오해받기는 쉽지 않지만, 흑인이 백인으로 오해받기는 쉽다는 대목이 있다.
소설 속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추론해 보자면, 흑인이 백인으로 오해받기가 쉬웠던 요인은 사회 규범이다. 당대 사회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각각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규정되어 있었다. 또한, 흑인은 오랫동안 박해받은 만큼 저소득층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규범에 속박되지 않은 흑인들은 상대적으로 백인으로 인식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명확한 분리 정책이 있는 사회 속에서 백인들은 당당하게 백인 출입 공간에 들어가는 흑인, 중산층 혹은 상류층인 흑인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테다. 그렇다면 아이린과 클레어는 ‘패싱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패싱한 것’인가?
5.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의 의미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패싱(passing)'을 ‘백인 행세하기’로 번역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첫째,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어는 오직 인종주의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반영하며, 계급주의에 관한 내용은 포섭하지 못한다. 둘째, 백인의 개념이 명백하지 않다. 셋째, 아이린과 클레어가 ‘백인 행세하기’를 수행했는지 불명확하다.
그럼에도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은 책에서 드러난 인종 간의 층위를 가장 잘 설명한다. ‘행세하다’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지녔을 지라도, 백인이 사회의 기준으로 여겨지고 흑인이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인 행세하기'라는 번역은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