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스 Aug 22. 2022

젊은 베리베리 스트로베리의 슬픔!

나의 서글픔 연대기

 


   ‘웃프다!’라는 말이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적절하면서도 재미있는 말이다.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을 이렇게 한 단어로 명징하게 축약할 수 있다니... 역시 짬짜면의 민족이다.  

   내 몇 안 되는 재주 중에 하나는 ‘내 슬픈 이야기를 재밌게 푸는’ 재주다.

   실수담, 혹은 방황하거나 황당했던 이야기를 썰로 풀면 지인들은 박장대소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때 생각나서 울컥! 하는데 사람들은 깔깔~ 거리더라. 가학적인 성향이 있는 건지, 아니면 공감지수가 미지수인 건지~ 못된(?) 그들의 찰진 리액션을 보면 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 나는 좋았던 기억, 재미있던 기억뿐만 아니라 슬픈 이야기도 차곡차곡 모으게 된다.      


   오랜만에 쓰는 글, 오늘은 ‘나의 서글픔 연대기’에 대해서 한 번 말해보고자 한다.     






  예전에도 밝혔듯이 나는 물건에 별 관심이 없다. 먹는 건 좋아하면서 갖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소유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고 또 솔직히 부담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 귀찮고 싫은 것 중에 하나가 쇼핑이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엄마 아빠한테 뭘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별로 없다. 친구들이 ‘변신 로봇’ 갖고 놀 때 나는 건담 그림을 그려 친구들에게 팔았고 (한 장당 500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 ‘삐삐’ 가지고 연애를 할 때 나는 ‘말괄량이 삐삐’를 읽었다. 양말 구멍에 엄지발가락이 온전히 드러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한테 “양말 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던 것 같다.




 이렇게 둔감하고 또 무던한 아들이다 보니 아마도 엄마는 날 키우기 쉬웠을 거다. 주는 대로 먹고 또 사주는 대로 입었으니, 그러면서도 한 번도 궁시렁 거리지 않으니...

  어느 순간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셨나 보다!


  ‘요 녀석 좀 보소. 대충 키워도 되겠군.’


   마치 핸드폰 게임에서 버튼 하나를 눌러서 ‘자동사냥’ 하듯, 엄마는 나를 방치하듯(?) 키우셨다. (물론 엄청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근데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아니 편의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내가 군말 없어도 가끔은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있었다. 이를 테면 교복이 그랬다.


  형이랑 4살 차이인데 내가 학교에 빨리 들어가는 바람에 학년은 3년 차이가 났다. 어쩌다 보니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딱 ‘3년 차이’기에 형이 졸업하면 내가 입학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나는 형이 입던 교복을 물려받았다. (혹시 이래서 엄마가 나를 1년 빨리 보낸 건가?) 친구들이 다들 트렌디한 교복 매장에서 치수 재고 안감 고를 때, 엄마는 구멍 난 형의 바지를 한 땀 한 땀 꿰매셨다.


  아직도 입학식 첫날이 기억난다. 교실에 들어가자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쟤 뭐냐?” “쟤라니? 형 같은데.. 3년 꿇었나 봐.” “이상하다. 얼굴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다들 나 보고 수군수군거렸다. 참고로 우리 학교 교복은 목부터 어깨 기장까지 인공 가죽으로 되어있었는데 형이 3년 내내 어찌나 거칠게 입었는지 (참고로 형은 축구부였다) 가죽은 거의 사하라 사막처럼 쩍쩍 갈라져있었다. 교복에도 빈티지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암튼 마치 무리에서 쫓겨난 늙은 수사자처럼 낡은 갈기를 세우고 복도를 걸으니 주변 아이들이 알아서 옆으로 비켜나더라. 으르렁~ 한번 해줄까 하다가 참았다.     



   교복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문제는 체육복이었다. 그 사이에 체육복은 스타일도 달라졌고 색상까지 바뀌었다. 다른 애들 체육복은 초록색인데 나 혼자 주황색이었다. 아마 세렝게티에 있다면 딱 치타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은 색이었다. 엄마한테 말하니 뭐 어떠냐고 그것도 개성이라고 그냥 입으라고 하셨다. 형이 그동안 신축성(?) 있게 만들어 놓았기에 오히려 입기 편할 거라며 당신은 내게 약을 치셨다.


   어쩔 수 없이 체육시간에 혼자 주황 체육복을 입고 체조를 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스탠드에 앉아있는 여학생들 모두 날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으니. 감수성 하나는 끝내주게 예민했던 나는 볼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기준!! 양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

  하필 내 자리가 무리의 정중앙이어서 만약 북한의 김정은이 봤다면 ‘매스게임’인 줄 알고 착각해서 박수쳤을 지도 모른다. 보다 못한 체육 선생님은 바꿔 입으라 하셨다. 사정을 말씀드리니 자신이 갖고 있던 체육복 하나를 건네주셨다. 꾀죄죄하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보호색을 띠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더 황당한 건 군대에 있을 때 일이다. 힘든 유격훈련을 끝내고 오랜만에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연락하니 당신은 “우리 아들!!” 이러면서 반갑게 전화를 받으셨다.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별일 없지?” “응. 없어요. 엄마!”

  우리는 그렇게 통상적인 질문을 던지고 받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디예요?”

  “응.. 강릉! 아빠랑 동네 친구들이랑 여행 왔어.”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근무하는 곳이 강릉이었으니까. 경포대에서 차로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엄마! 나 보러 와요.”

  나는 내심 기대했다. 엄마 아빠가 오면 외박 나갈 수 있으니까. 반나절이라도 부대 밖에서 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 생각은 달랐나 보다.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아쉽지만 그럴 수 없어.”

  뒤에서 아줌마 아저씨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막걸리에 회 한 접시 드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하지만 엄마 아빠는 아들이 2년 6개월 군대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으셨다. 어련히 알아서 잘 있겠지! 생각하셨단다. 하긴 내가 그만큼 휴가를 자주 나가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애써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으니..       


   탈영병 색출 작업 때문에 거의 3달 만에 휴가를 나왔다. 얼마나 가족들이랑 여자 친구 보고 싶은지,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잔 채로 나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인터폰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나 왔어요.”

  그러자 엄마는 문도 열어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상하다. 왜 그러지? 근데 감기라도 걸렸나?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 같은데..

  “왜 안 열어줘요?” 답답해서 나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문 밖으로 누군가가 나왔는데, 어! 엄마가 아니네. 처음 본 아줌마였다.

  “누구세요?” 그녀가 물었다.

  “저요? 저..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봤다. 뭐지? 이 여자 우리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나도 경계의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보니 이랬다. 2달 전에 우리 집은 다른 동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리고 그걸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거다. 엄마한테 전화하니 당신은 “미안! 깜빡했네.”라며 아파트 동 호수를 알려주셨다.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정신없이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잖아.

  “와~ 여기가 우리 집이구나!”

  그렇게 감격하며 문을 열어봤지만 이런... 잠겨있었다. 키가 없으니 들어갈 수 없었다. 전화를 하니 엄마 아빠, 형 다들 일하거나 약속이 있어서 저녁에나 들어올 수 있단다. 하릴없이 나는 주위를 서성거렸다. 극장에 가서 영화나 볼까 했지만 수중에 4,000원밖에 없었다. 이 돈으로는 영화 예고편도 볼 수 없었다. 핸드폰도 없으니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집에를 못 가니 옷도 갈아입을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노숙자처럼 동네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보니 그때 우리 동네에 처음 생긴 배스킨라빈스가 눈에 들어왔다.




  ‘맛있겠다!’

  가로등을 본 나방처럼 나는 홀린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고를까 하다가 ‘베리베리 스트로베리’를 골랐다. 딸기같이 상큼한 맛이 댕겼다. 콘 위에 동그랗게 오른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자 이럴 수가! 너무 맛있었다. 식도에 조명탄이 팡팡!! 터졌다. 군대에서 먹던 500원짜리 하드와 비교조차 실례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날 힐끗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어땠는지. 연탄재처럼 까맣게 탄 얼굴, 까까머리에 군복까지. 그런 사람이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쪽쪽 빨고 있으니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누가 봐도 시선 강탈할 수밖에...


  베리베리 쏘리 아니 스트로베리.   

     

  자격지심인가? 아니면 그동안 쌓인 감정이 농축되어서 그런가! 입 속에 꾸역꾸역 들어간 서글픔 종합세트를 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 맛있어서.. 너무 부드럽고 또 달콤해서... 더 슬펐다. 대충 입에 쑤셔 넣고 나가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나 당장 30시간 후에 부대 복귀해야 한다고! 옷도 못 갈아입고 이게 뭐예요?”


   그동안의 서글픔이 한순간에 몰아쳤다. 남들은 아들 휴가 나오면 그동안 고생했다며 갈비찜 해주고 회도 사주고 그동안 피부 상했다면서 얼굴에 팩도 해준다는데..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내가 순딩 순딩 하니까 진짜 아들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앞으로 고슴도치처럼 진짜 까칠한 아들이 되어주겠어! 그렇게 마음에 독기를 품었다. 그때 엄마가 말했다.

   “아들! 미안해. 대신 엄마가 저녁에 해물탕 해줄게!”

   “어... 엉?”

   “너 좋아하는 새우와 바지락 가득 넣고 칼칼하게..”

  갑자기 서글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감칠맛이 대신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그런 걸로 넘어갈 줄 알아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이 정도로 약해진다면 사나이 밸도 없지!

   “그리고 형이 초밥 사 온다는데...”

   “그... 래요? 유부? 아니면 생선 초밥?”

   “생선....”

   “오~ 맛있겠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울분이 쏙 들어갔다. 유부면 절대 용서 안 하려고 했는데...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이랑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다소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방이 새로 생겼으니. 그동안 형이랑 같은 방을 썼는데, 인생 최초로 내 방이 생긴 것이다.

  “엄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새우 머리를 뜯으면서 엄마한테 서러움을 토로했다. 엄마는 미안하다! 말하며 씨익 웃었고 나는 또 무던한 아들로 돌아갔다. 뿌연 국물을 휘휘 젓는 국자처럼 응어리진 내 마음은 금세 풀어져버렸다.


   맛난 저녁을 먹고 침대에 대자로 눕자 천장에는 세계지도가 붙어있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세계지리 덕후인 아들을 위해 아빠가 직접 사서 붙이셨단다. 몸이 아픈 아빠가 의자 위에 올라가 저걸 붙이느라 얼마나 낑낑거리셨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날 밤 나는 따뜻한 아빠의 시선을 느끼며 한참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늘 그렇지만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서글프고 억울하고 또 먹먹하고...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이 슬픔을 차곡차곡 잘 저장해 놓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걸 잘 버텨내면 언젠가는 좋은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한결 나아지곤 한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그때 당시에는 엄청 힘들었던 일도 지금 다시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이미 다 겪어서 그런가! 아니면 다행히 잘 넘어가서 그런가! 슬프고 아픈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훌륭한 무용담으로 포장된다.


   아직도 배스킨라빈스에 가서 ‘베리베리 스트로베리’를 시킬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피식 웃으면 딸이 물어본다.

  “아빠! 왜 웃어?”

  “엉... 그게 있잖아. 아빠가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엄청 서글픈 일을 겪었단다!!”

  그러면서 또 내 썰이 시작된다. 뭐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키득 대는 딸을 볼 때마다 그래도 내가 제대로 ‘웃프게’ 살아왔구나! 양쪽 볼을 광대 위로 올리게 된다.




(FIN)


작가의 이전글 한밤중 경찰이 문을 두드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