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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스 Dec 18. 2020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아르바이트 일대기 (2)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마스크를 껴서 그런지 숨 쉬는 내내 안경에 습기가 자꾸 찬다. 코끝을 다시 매만져보지만 채 1분을 가지 않는다. 닦아도 닦아도 고새 제자리인 게 꼭 요즘 내 마음만 같다. 이놈의 코로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럼 다시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나는 엑스트라를 거의 한 달 가까이했고 총 300만 원 정도 벌었다. 그때 당시 물가를 생각해보면 꽤 짭짤한 보수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건 늘 그렇듯, High risk High return이다. 그만큼 위험했고 또 무모하리만큼 단순했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뛰라면 뛰고 가라면 가고 그대로 있으라면 몇 시간이고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온몸에 짠기 가득한 채 밤하늘 아래 널브러져 있으면 내가 사람인지 아니면 물미역인지 헷갈리더라.      


 만약 시간을 돌려서 다시 그 상황에 놓이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절대로. 아무래도.. 혹시나... 그래도.... 할 듯싶다. 아직도 불화살만 보면 하악하악 숨이 차오르는 게 아무래도 전생에 불나방이었나 보다.      


 며칠 엑스트라를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겼다. 버스에 타면 최대한 앞자리에 앉는다. (물론 텃세가 심해 몇몇 좋은 자리는 선배 엑스트라의 고정석이다.) 문경에 도착하면 버스가 채 서기도 전에 누구보다 빨리 내려 의상 차를 향해 허겁지겁 달린다. 학창 시절에 급식 먹으러 갈 때도 이렇게 안 뛰었는데... 그렇게 뛰다 보면 다른 출연자들도 좀비 떼처럼 내 뒤를 쫓아온다. 하지만 그때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거의 제일 먼저 도착해서 노란 파렛트 안에 그나마 멀쩡한 아이템들을 선점한다. 이번에는 왼발에 왼 군화, 오른발에는 오른 군화를 신을 수 있다.   

  

 ‘아~ 행복이란 것은 멀리 있지 않더라!’     


 구멍 나지도 않았으며 냄새도 상대적으로 덜 난다. 전에 입던 옷이 연안 부둣가에서 나는 비린내라면 이번에 집은 갑옷은... 음~ 뭐랄까? 이촌동 초밥집에서 오마카세로 나온 초밥의 비린내 정도랄까? 뭔가 고급진 비린내다. 입으면 따끈따끈한 게 ‘아부리’된 느낌이다.      


 의상을 갈아입으면 바로 옆에 분장 차로 이동해야 한다. 반장의 지시 하에 우리는 나란히 정열로 줄을 선다. 앞사람 뒤통수만 보면서 걷는 게 흡사 통조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느낌이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수동, 직접 걸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옛날 병사들은 전부 다 수염이 있었을까?’

분명 무모증 병사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반장한테 감히 대꾸할 꿈도 꾸지 못한다.    

  

 인간 컨베이어 벨트는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본드질’이다. 줄을 서서 내 차례가 되면 분장팀 형님은 커다란 붓(도배 붓 같은 거)으로 우리 입 주변을 삭삭 훑는다. 왼쪽에서 오른쪽, 또 오른쪽에서 왼쪽 딱 두 번이다. 이때 중요한 건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는 거다. 실수로 조금이라도 입 열었다간 입안 깊숙이 본드가 들어간다. 만약 자식들 영어 발음 완벽하게 하고픈 강남 엄마들 있으면 여기로 와라~ 더 이상 비싼 수술받을 필요 없다! 입을 연채 본드질 3초만 쓱싹 받으면 뉴욕 브롱스에 가도 환영받을 수 있다.     

 

 두 번째 파트는 ‘수염’이다. 연기자들은 분장 차 안에서 정교하게 한 올 한 올 붙이지만 우리는 그런 거 없다. 그냥 털 뭉텅이를 손에 쥐고 본드 묻은 입에다가 턱! 붙인다. 마치 차압 딱지처럼 말이다. 너무 아프다고 항의하고 싶지만 이미 이모탭의 저주가 걸린 듯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뒤에 사람이 밀면 어쩔 수 없이 나는 털을 단 채 앞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은 가위 섹션이다. 이발소용 가위를 들고 분장팀 누나가 ‘스위니 토드’처럼 춤을 춘다. 입술이 드러나게 날카로운 가위로 입에 달린 털 뭉치를 자르는데... 다시 말하지만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자칫했다가 윗입술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 눈을 감고 10초 정도 마음을 졸이다 보면 작업이 끝나 있다. 확실히 프로는 다르더라.      


입에 KBS 본드를 붙인 이모탭


 이렇게 3단계 작업이 끝나면 병사 수염이 완성된다. 솔직히 이해는 된다. 분장팀 5~6명이 많으면 3~400명의 출연자를 한 시간 내에 분장시켜야 하니 얼마나 그들도 곡절이 많겠나? 그래도 다른 건 다 참을 순 있는데.... 밥 제대로 못 먹는 건 진짜 난감하더라. 밥이 눈앞에 있는데도 본드가 눌어붙어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다. 답답해서 수염 좀 뗄라치면 반장이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친구는 최대한 입을 열어본다. ‘오~’ 정도는 열 수 있는데 ‘아!’까지는 절대 안 된다. 본드가 갈라지면서 입가가 너무 아프고 또 조금 무리했다가 수염 떨어지는 날에는 그날로 천재지변이 시작되니까.      


 ‘오’ 하고 입을 벌리면 친구가 내 입에 잘게 부슨 밥을 넣어준다. 녀석이 ‘오’하면 나도 김치를 반으로 잘라 그 녀석 입에 넣어준다. 누가 보면 우애 좋은 형제인 줄 알겠다. 형님 한번 아우 한번~ 바람 불어 실수로 윙크라도 할라치면 그대로 문경새재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된다.      


 근데 왜 혼자 못 먹냐고? 수염이 입 주변에 너저분하게 붙어있어 자칫했다가는 수염도 그대로 먹으니까. 거울이 없는 한 이게 최선이었다.


 “곰조로도 목을려”

 녀석이 말했다.

 “뭐?”

 곰! 조!!”

 무슨 말인지 몰라 몇 번이고 되물으니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 가방에서 감자를 꺼내더라. 입이 이러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 있나? 그다음부터 우리는 ‘감자’ 대신 ‘고구마’, ‘갈치’ 대신 ‘고등어’를 선호했다.      








 그렇게 몇 주 지나니까 나는 후삼국 시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오히려 촬영이 없는 날이 더 문제였다. 스니커즈 신는 건 심심했고 뽀송뽀송한 후드 티는 남성미가 거세된 느낌이었다. 가끔 수염 없는 친구들 만나면 더 크고 오라며 엉덩이 한 번  걷어차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촬영 스케줄을 보니 밤씬에 공성전이 있었다. 공성전이 뭐냐고? 성벽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을 하고 또 수비를 하는 전투를 말하는 거다. 한마디로 사극 전투의 끝판왕이다. TV에서만 보던 그 전투 장면에 내가 참여하다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밤이 되자 나는 신라 병사 옷에서 고구려 병사 옷으로 환복하고 기다렸다. 어떻게 찍을까? 궁금하더라. 투석기, 화차, 그리고 수많은 불화살 그리고 공격하는 쪽과 사수하는 쪽의 치열한 대결... 생각만 해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더라! (비록 본드 때문에 ‘와~’ 하지 못하고 ‘오’ 했지만)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는 검을 휘두르며 실감 나게 싸웠다. 아무래도 체질인 것 같더라. 특히 수염 휘날리며 싸울 때는 아드레날린이 막 솟구쳤다. 풍차만 없을 뿐, 돈키호테라도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시간 넘게 휘두르다 보니 온 몸에 맥이 풀리더라. 땀이 흘러 속바지가 흠뻑 젖었다. 잠시 촬영이 중지되고 헉헉 거리며 숨 돌리는데 반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중에 혹시 저 사다리 탈 사람 선착순 2명?”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일지 2장(이틀 치 일당) 끊어줄게.”

 그는 손가락 두 개를 토끼 귀처럼 움직였다. 알고 보니 원래 사다리 타는 건 스턴트맨이 하는 건데 현장에 오던 스턴트맨이 실수로 다른 곳에 갔단다. 자원자가 없자 일지는 3장까지 갔다.


 ‘와~ 3장이면 그게 얼마야? 오늘만 일하고 이틀 쉴 수 있잖아.’

 “야! 저거 우리가 할래?”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만 해도 옆에 있던 친구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나~ 주위를 둘러보니 녀석은 불화살을 꽂고 해자(성곽 옆에 있는 물구덩이)에 빠져있더라. 부러웠다. 시체 역할이 제일 좋은 거니까. 땀도 안 나고 누워서 시간 때울 수 있으니. (다만 너무 오래 있으면 온 몸이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처럼 될 수 있다.)    

 

 암튼 나는 손을 들었다. 사다리 한번 올라가는데 삼일 치라! 아무리 생각해도 개꿀이었다. 행여 다른 지원자에게 자리를 뺏길까 싶어 나는 ‘저요~ 저요’ 구처럼 손을 들었다. 아마 책상이 있었다면 거기에 분명 올라갔을 거다. 엑스트라 중에서 내가 제일 어린 축에 속했기에 반장은 5~6명의 자원자 중에서 나를 뽑았다. 뭔가 간택당했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기분이 흡족했다.     





 다시 촬영이 재개되고 나는 사다리 앞에서 대기했다. 독사 같은 연출이 우렁차게 “큐!”를 외쳤고 나는 도움닫기를 하며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위에서는 백제병사들이 불화살을 나한테 쏘더라. 엑스트라 10일 정도 하니까 불화살 정도는 이제 껌이었다. 사타구니 긁으면서도 피할 수 있었다.


 옆을 보니 다른 스턴트맨들은 역시 빠르더라. 나도 제법 빨랐는데 내가 2계단 올라갈 때 그들은 이미 5계단을 올라갔다. 날다람쥐 같았다. 두 손 두 팔을 이용해서 열심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성벽 위에 백제 병사들이 보였다. 늘 해왔던 것처럼 성벽을 넘어서 칼로 베는 시늉을 하면 된다. 역사가 말하는 대로 저 깃발은 우리 차지였다. 그때였다. 사다리 마지막 계단을 밟으려는데 코앞에 백제 병사 두 명이 날 보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더라.      


 ‘뭐... 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 끝을 잡더니 확 밀기 시작했다. 어... 어~~ 나는 사다리를 잡은 채 그대로 뒤로 밀렸다.

 

 “이러지 마~ 진짜~” 나는 입으로 온갖 쌍욕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배역에 충실했다.

사다리는 점점 기울어졌다가 다시 걸쳐졌다가 진자운동을 반복했다. 안 되겠다 싶어 미친 듯이 손을 뻗어 성벽을 잡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두 다리는 공중에서 에어워크 중이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래서 일당이 3 배구나!!’     


 나는 사다리를 잡고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이게 더 독이 되고 말았다. 사다리는 120도 꼬꾸라졌고 나는 5~6m 아래로 그대로 추락했다. 밑에는 매트리스가 있었지만 나는 반만 걸친 채 아래로 떨어졌다. 충격이 제대로더라. 밤하늘의 별은 무심했으며 그 아래로 휙휙~ 지나가는 불화살들의 잔영이 보였다.

 

 ‘나도 시체나 할 걸’

꺼져가는 정신에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였다.   







 다행히 나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대신 며칠 동안 끙끙 앓을 뿐이었다. 3일 치 페이는 5일 치 병가로 이어졌다.

 ‘앞으로 다신 가나 봐라.’

 다짐 위에 다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신라 병사 옷을 입고 불화살 맞은 채 물속에 풍덩 빠지고 있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입사해서 조연출 6년 중에 3년을 사극 했다. 외모가 현재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역시 머리보다 몸 쓰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가! 그때처럼 손들지 않았는데도 생기는 사극마다 자꾸 나를 보내더라. 덕분에 정말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신혼여행 마치고 공항에서 부여 세트장으로 직행할 때눈물이 앞을 가렸다.




  위 사진은 <대왕의 꿈>이라는 사극에서 내가 ‘진지왕’으로 출연한 모습이다. (얼마나 진지하면 이름도 진지왕이다. 어색하다고? 노노~  진지한 역할에 빙의되기 위해 일부러 표정을 저렇게 한 거다) 맨날 병졸, 노비 이런 역할로 출연하다가 용좌에 앉게 되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더라. ‘망이 망소이’가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뻐할지... 감히 예상도 못하겠더라. 비록 드라마에서는 폐위되었지만...


 그래도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이름 모를 수백만 병졸들의 혼이 살아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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