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가을 09
멀리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차를 가지고 가는 곳이 있다. 혼자 좀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지하철 타고 여행 가듯 가는 곳도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달리는 차들을 본다. 사십여 분 달리면 십 년 넘게 다닌 카페에 닿는다. 지하철을 타면 앉아 있는 사람, 서 있는 사람, 통화 소리, 안내 방송, 휙휙, 덜컹덜컹 덜커덩의 시간 속에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다.
누군가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삶. 서른한 살, 꼭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한 해였다. 가끔은 걱정했고 한 달에 한 번 헤어지면 슬펐지만 나머지는 잘 살았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이 좋았다.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 어떤 타인과도 부대끼지 않는 것. 자식이라도 때가 되면 훌훌 떠나보내고 싶다. 늘 근심 가득한 우리 엄마 얼굴 말고 웃는 얼굴로 보내고 싶다.
기숙학원 퇴소 안내 메시지가 두어 개 왔다. 수능 당일 아이의 짐을 챙겨 시험 치르는 학교로 데리러 가면 된다는 것이다. 사흘 앞이다. 가장 사랑 넘치는 영상들을 보고도 눈물이 나는 마지막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깊이 눌러쓴 모자를 벗기고, 앞머리를 넘기고, 이마를 짚으며 너 아프다고 말하는 장면들. 우리는 어째서 사랑하게 되는가.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다시 또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있으면 내가 운전할 때와 달리 모든 이가 움직이는 가운데 나만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하철에서 올라와 걷는다. 비로소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인다. 딸 앞에서 활짝 웃어야 할 텐데. 그의 인생이니까 내가 먼저 우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가 울 때에만 같이 울어주고 싶은데. 등 두드리며 괜찮아, 잘 될 거야, 말해주는 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깊이 사랑했으니 나는 이미 그 애 마음이 되어 아프고 힘들고…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나는 적는다. 너의 엄마라서 지난 일 년마저 행복했고, 힘들었고, 다시 태어나도 다시 만나도 너였으면 한다고.
역시 인생에서 누군가 사랑하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음을. 그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사랑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주어진 하루에 감사한다. 다시 지하철을 탄다. 걷는다.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은 차를 가지고 멀리 가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