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누이는 내가 중2 가을 무렵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 자형(姊兄)이 은퇴한 후에도 자녀들이 하나씩 제짝을 찾아 떠날 때까지 청상과수(靑孀寡守)로 살아오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삶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3년쯤 전부터 자형의 고향인 장성에 농막을 짓고 주말마다 내려와 그때까지 처분하지 않아 남아있던 약간의 전답에 갖가지 푸성귀를 심고 가꾸며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중이다.
원래 자형네가 살던 마을은 현재의 위치보다 더 북쪽의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마을 위로 철로의 긴 교각이 흉물처럼 세워지자 답답하다며 마을 사람들이 한집 두 집 마을 아래 남쪽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랫동네에 더 많은 가구가 거주하며 옛 마을 이름에 신(新) 자를 붙인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이네가 시골에 머무는 날이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더 길어지고 있다. 가끔 콧바람을 쐬러 상경해도 이제는 여러 날을 머물지 못하고 내려와야 한다. 상추, 고추, 오이, 고구마 등을 가꿀 때는 얼마든지 여유를 부리며 농막을 비우고 한동안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개나 닭처럼 동물 가족이 늘어나면서 하루라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아주 환영할 일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로 가까워지며 자주 왕래가 가능해졌고 음식 솜씨가 좋은 누이의 반찬거리를 얻어다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하다. 재작년부터 김장김치도 해결했고, 자가 막걸리도 수시로 맛볼 수 있으니 그저 흡족할 따름이다. 대신에 나는 소소한 공산품 따위를 사다 드리는 것으로 감사함을 대신한다.
지난 주말에도 바람 쐬듯이 훌쩍 누이네를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수돗가에 뒹굴고 있는 통나무 한 토막이 눈에 띄었다.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진 채 제대로 말라 있었다. 마침 거실 바닥에 놔둔 가습기를 올려놓을 적당한 받침대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걸 깨끗이 씻어서 쓰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어 자형의 의견을 물어본 뒤에 차 트렁크에 싣고 돌아왔다. 크기는 안성맞춤인데 균형이 맞지 않아 가습기가 기울어진다. 목공소에 가져가 똑바로 잘라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차에 실었다.
목공소 골목이 좁아 통나무를 끌고 들어간 돌담길
전화로 미리 목공소를 알아보고 도착한 곳은 오래된 시가지에 있는데, 진입로가 좁아서 차가 바로 들어갈 수가 없다. 다른 목공소로 가는 게 좋을까 순간적으로 생각해보다가 번거롭게 여겨졌다. 길 한편에 주차한 후 차에 싣고 다니는 손수레에 통나무를 옮겨 싣고 골목길을 걸어 들어갔다. 한겨울 이건만 따뜻한 날씨 덕분에 앙상한 줄기만 남아있어야 할 담쟁이 넝쿨들이 빽빽하게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돌담길을 따라 20여 m 걸어 들어가니 허름한 목공소가 나왔다.
통나무는 위아래의 굵기가 다르므로 일단 고정하면 한방에 잘라야 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목공소에는 반경 25cm 정도의 전기톱이 없다. 그러니통나무를 자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결국 전기 대패로 갈아서 잘라냈다.
나 같으면 작업하기 힘들다며 다른 목재소로 가보라고 할 법하건만 연로하신 목공소 사장님은 30분 넘게 통나무와 씨름하더니 마침내 고객의 요청에 부합된 작품(?)으로 마무리하셨다. 나는 작업 내용보다 작업 방법이 힘들었던 탓에 목공소 사장님에게 수고비를 넉넉하게 지불하였다.
다시 손수레에 통나무를 싣고 주차해둔 곳까지 나오는 길에 담벼락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담쟁이를 보며 도종환 시인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담쟁이 같은 목공소 사장님과 그의 담벼락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담쟁이」 는 이전에 외워둔 시였기에 몇 번이고 노래 부르듯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시인의 시는 교훈적이면서도 인생의 심연을 자극하듯 다가오는 시가 많다. 도종환 시인은 1955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여 충북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고,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고두미 마을에서」로 등단하였다. 2012년 제19대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곁에서 바라보며 쓴 『접시꽃 당신』은 순애보를 그린 시집인데 이를 계기로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시집으로는 매우 드물게 추정 300만 부가까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 『해인으로 가는 길』,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 다수 있고 산문집으로는 『모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마음의 쉼표』 등이 있다. 도종환 시인의 시 중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도 마음을 다잡게 하는 힘이 있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목공소 마당에서 너무 반갑게 만난 목화 화분
어떤 목표를 향하여 달리다가 장애물을 만나거나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겨내기 어려워 스스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누구나 이겨내는 자만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성공한 사람들이 이루어낸 성과만 보면 화려한 각광 뒤에 숨겨진 피땀 어린 수고와 눈물겨운 노력의 시간을 잘 모른다.
이 시를 처음 대하면서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나도 그러한 과정을 알지 못하고 뭔가를 진행하다가 포기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