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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Feb 02. 2022

나의 애송시 (8) 허물

- 허물 / 정호승

나의 애송시 (8) 허물 / 정호승 



“예쁘냐?”

무릎 위에 둘째 아이를 앉혀놓고 좌우로 몸을 흔들거리며 어르는 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께서 조용히 물어보셨다.

그렇다고 ‘네!’하고 선뜻 대답하기도 계면쩍어,  

“어머니가 보시기에 손주가 안 예쁜가요?”하고 나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내 속을 이해하려면 셋은 아봐야 알 것이다.”라며 엷은 미소를 지으셨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자식을 대여섯쯤 낳아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을 전제로 생각하더라도 일곱 남매를 낳고 기르는 일이 어디 예삿일이었을까? 자식마다 성격도 제각각 다르고 취향도 달랐을 터인데 어찌 그 뜻을 다 받아주고 때로는 타협해가며 키워냈을까 상상을 해본다.

물론 지금이야 옛날의 육아 방식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둘뿐인 자식들과도 부딪치며 때로는 전쟁을 치르는 마당인지라 달리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지혜가 그것을 가능케 했으리라.      


개천이나 방죽 등 물속에서 사는 우렁이가 새끼를 낳은 후에 빈 껍데기가 된다. 어머니는 종종 우렁이 껍데기가 물 위에 둥둥 떠서 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며 ‘우리 엄마 시집간다’라고 새끼들이 놀린다는 내용을 빗대어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임을 설명하셨다.

어머니는 맞벌이하는 차남의 처지를 생각하여 두 손주가 걸음을 떼기 시작할 무렵까지 돌보아주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매주 30분쯤 떨어진 부모님 댁으로 달려갔다. 부모님을 뵈러 갔다기보다 내 자식을 보러 간 것이다. 칠 남매 중에도 어쩌다 보니 차남의 손주들만을 데려다가 키워주셨는데 그러한 이유로 정이 더 들었던 까닭인지 우리 아이들을 애틋하게 생각해주시는 면도 있었다. 아무튼 농한기나 농번기를 고려하여 친가와 처가에서 교대로 고생하셨다.      


어머니는 6년 반 동안을 병원과 요양원의 신세를 지다 돌아가셨다. 좀 뚱뚱한 편이었던 어머니가 병석에 누어 해가 지날수록 화석처럼 물기를 잃고 말라 가는 모습에서 한없는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자식으로서 해드릴 수 있는 게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처음에 쓰러지신 후 병원에서 퇴원하여 서울에 있는 장남 집에서 가까운 요양원으로 옮겨 지내셨다.

매일 조석으로 장남 내외가 문안 인사를 다녔다. 물론 서울이나 지방에 있는 다른 자식들도 수시로 문병을 다녔다. 차남인 나는 멀리 떨어져 지내는 상황이라서 기껏 한 달에 두어 차례 얼굴 내미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뵐 때마다 계속 야위어가는 노모의 모습에 내 가슴은 처연한 마음이 채워졌다.      

느티나무에 남겨진 매미 허물

     

허물 / 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미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정호승(鄭浩承)은 1950년 1월 3일, 경남에서 하동 출생하여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등단, 1979년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였는데, 문학계에서 <슬픔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천주교 신앙의 영향을 받은 「서울의 예수」,「시인 예수」 등이 있고, 불교 색채가 있는 소설 「연인」을 지었다.   

   


사무실 건물 옆에는 제법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네 그루 사이좋게 서 있었다. 어떤 직원은 흡연하기 위해서, 혹은 의자에 오래 앉아 컴퓨터 화면과 눈싸움을 하던 직원들이 바람을 쐬러 찻잔을 들고 잠깐씩 내려와 느티나무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곤 하였다.

이 나무에 여름철마다 매미들이 날아와 어찌나 경쟁적으로 울어대는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면 어떤 날은 서너 마리의 매미가 허물을 남기고 사라지곤 하였다. 우리는 한 계절이 끝날 무렵까지 수십 마리가 이곳에서 탈피(脫皮)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날아간 흔적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심심찮게 말씀하시던 물속을 터전 삼아 살던 우렁이 껍데기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던 매미는  허물을 벗어놓 사라졌다. 그러나 매미가 활동하던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올해도 봄이 되면 느티나무 가지마다 새 잎새들이 나와 한여름에는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리라. 그러면  땅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애벌레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매미들이 무에 올라 후배 직원들이 휴식하는 그 그늘에서 귀가 아프도록 우렁차게 매맴 울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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