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바우 Jan 30. 2022

나의 애송시 (7) 여승(女僧)

- 여승 / 백석

나의 애송시 (7) 여승(女僧) / 백석



세상을 관통하고 흐르는 시류는 늘 변해왔고 여전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결혼관만 하더라도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다. 같은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 중에도 20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마흔 살이 훌쩍 넘어가고 있지만 결혼하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미 쉰 살을 넘긴 직원도 있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나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듯했다. 결혼 적령기라는 단어를 꺼내기가 무색한 시대에 사는 셈이다. 단순히 결혼이라는 화두만을 놓고 생각해보면 요즘 비혼(非婚)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삼사십 년 전과 현재를 단순히 비교해봐도 분명히 변화된 모습이다.      


내 친구 중에도 가정을 꾸리지 않고 청춘을 보낸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 특히 생각을 잠깐씩 멈추게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중학교 시절의 여자 동창인 수민(가명)이다. 이 친구는 출가하여 현재 남해안의 어느 암자에서 비구니(比丘尼)로 살아가고 있다. 수민이 몇 해 전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딱 한 차례 얼굴을 내민 적이 있다. 그날 여흥 시간에 다른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유행가 한 곡 불렀었다. 어찌나 구성지게 잘 부르던지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수민이 어떤 연유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 주위에서 들어본 바가 없고, 나 또한 직접 물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젊은 날 그녀가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살아온 역정은 그저 베일에 싸인 채이다.     

 

나와 수민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졸업한 초등학교가 달랐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다만 수민이 살았던 시골 마을이 중학교에서 가까웠고 통학 때마다 그녀의 마을 앞을 지나쳐야 했으므로 서로 낯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민은 키가 큰 편이었고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서 호감이 가는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남녀 공학인 중학교임에도 같은 학년에 남학생 두 반과 여학생 한 반으로 나누어져 교실을 따로 쓴 데다가 남녀가 유별(?)했던 터라 졸업할 때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본 기억이 없다. 자연히 학교를 졸업하고 잊고 지내왔다. 30여 년 만에 동창회에서 그녀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된 그날 이후 나의 머릿속에는 <수민>과 <여승>이란 시(詩)가 한 묶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내면의 세계 한편에 둥지를 트는 착각도 들었다.           



여승(女僧) /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가지취 : 취나물 종류
* 금덤판 : 금광. 금점판
* 섶벌 : 재래종 일벌
* 머리오리 :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닥     



시 속의 여인은 평안도 산골에서 딸아이를 데리고 옥수수를 팔며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남편은 집을 떠나 십 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거기에 딸마저 죽었다. 여인 혼자 살아가기에는 열악한 사회환경에서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던 여인이 택한 길은 여승이 되는 것이었다. 여인이 한 맺힌 가슴을 누르고 삭발한 후 속세와 인연을 끊는 과정들이 시 속에 절절히 녹아 있다.    

  

백석(1912~1996)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고 오산고보와 일본 아오야마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등단하였고, 해방 후 북한에 남아 외로운 삶을 살다가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다.

남한에서는 1988년에 해금되었는데 1936년에 100부 한정판으로 유일하게 간행된 시집 《사슴》은 희귀본으로 시인들로부터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고향>, <북방에서>, <적막강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이 있다.      



중학교 동창회에서 수민을 만난 후, 한 3년쯤 흘렀을까? 동창회 총무를 맡은 친구에게서 어느 날 경조사를 알리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수민의 모친이 별세하셨다는 부고였다.

일과를 마치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장례식장 도착해서 먼저 조문을 하고 식탁에 수민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민은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마음이 아주 차분하였다.

문상객이 별로 없는 식장 안을 둘러보며 나도 궁색하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장에서 나오려는데 수민이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가리라 생각만 하는 사이에 무심히 몇 해가 흘러가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애송시 (6) 국화 옆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