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신앙이라도 되는 듯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등산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다. 산뿐만 아니라 시절 따라 낚싯대를 매고 바다로 향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나 주로 산을 찾아가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며 오르내린다. 나도 이들로부터 여러 차례 등산 모임에 동참을 권유를 받았다.
그런데 선뜻 그들을 따라나서기가 망설여진다. 운동이라면 근력운동을 하고 있고 집에서 가까운 뒷산 산책로나 호수공원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학창 시절부터 관계를 지속해온 향우들과 어울려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등산하는 게 나쁠 이유가 없으나 잦은 산행으로 무릎 관절을 염려하는 소심함도 얼마간 작용을 한다.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함께했던 직원 중에 무리한 등산으로 젊은 나이에 관절에 문제가 생겨서 후회하는 예도 보았다.
고창읍이 내려다 보이는 모양성(牟陽城)
나는 서둘러 올라가는 등산보다 산책하듯 느긋하게 걷는 산행을 즐긴다. 산책할만한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집에서 가까운 바다라면 순천만 갈대 습지, 와온, 화포가 있고, 산이라면 봉화산 둘레길을 걷는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 오르는 길도 괜찮다.
선운사에 도착하여 산사 입구에 주차한 후, 절까지 잘 포장된 그늘 길을 유유자적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사찰 정문에 이르러 경내에 들어가지 않고 대웅전 마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곧장 올라가면 오솔길이 시작된다.
더덕꽃이 필 무렵 절집을 조금 지나 숲 속 길은 더덕 향기로 가득 채워진다. 나무 그늘 어딘가에 숨어서 코끝이 아릴 정도로 진한 향을 내뿜는 더덕의 기운과 도솔천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져 문득 투명한 정신세계에 빠져든다.
선운사 입구에 만개한 꽃무릇 (9월말)
도솔암에서 내려와 선운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 후에는 산사 입구에 있는 식당가에 들려 산나물 비빔밥으로 갈증과 허기를 달랜다. 선운사 입구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풍천장어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풍천장어가 명성을 얻으며 찾는 이가 많아지자 양식 장어로 이 수요를 감당하고 있다.
선운사에 갈 때면 어쩌다 한번씩 그곳에서 자동차로 1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미당 시문학관(未堂詩文學館)>으로 향하곤 한다. 원래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였던 공간을문학관으로 개조하였다.
2001년 완공한 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나 작품집, 애장품, 시화 도자기,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서정주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여 2000년 85세로 타계할 때까지 15권의 시집에 1천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시는 역시 <국화 옆에서>가 아닐까?
미당 시문학관(未堂 詩文學館) 고창군 부안면 소재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는 1947년 11월《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까지 자연의 역할을 생각해볼 수 있고, 다른 의미로는 국화가 인생의 뒤안길을 비추는 소재로써 활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해마다 시월 말이 되면 고창 국화꽃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인 고인돌 유적과 운곡 람사르 습지와 연계되어 방문객들에게 늦가을 정취를 느끼게 한다. 국화꽃 축제는 다른 지역에서도 개최되는데 고창의 국화꽃은 미당의 소쩍새와 천둥, 무서리가 우리네 삶을 대변하고 있기에 나름 지역적 스토리텔링을 갖추고 있다.
한편 가수 송창식이 서정주의 시<푸르른 날>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다.
고창 국화꽃 축제에서
푸르른 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이밖에도 미당의 시로 <귀촉도>, <자화상>, <화사>,<동천>, <질마재의 노래>, <늙은 사내의 시> 등이 있다. 미당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시인으로 문학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 친일적 행동, 독재자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지탄을 받는다. 이에 대하여는시문학관 자료에도 그의 친일 행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