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햇살이 해찰하기 좋은 들녘 저만치에 있는 갈대밭에 쏟아지고 있다. 외로움과 고독을 끌고 온 황혼이 해풍처럼 일렁거린다. 한 줌 구름이 갈꽃의 끝에 내려앉아 공허의 시간을 허허롭게 바라보고 있을 때, 바람은 스륵스륵 여인의 허리띠 풀린 갈색 치맛자락 같은 갈대밭을 휘저으며 옮겨 다닌다.
봄날의 푸르름을 완전히 지워버린 갈대밭 사잇길을 따라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서 걷는다. 어떤 이는 갈대밭이 끝나는 곳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어떤 이는 8천년의 세월을 품은 시원(始原)의 해변, 여자만(汝自灣)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전망대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순천시 별량면 화포마을 해변의 갈대
갈대는 물가라면 어디에서나 자생한다.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일단 터를 잡기 시작하면 환경에 적응해가며 동심원을 그리듯 자꾸만 터전을 넓혀간다. 순천만 갈대밭은 갯벌습지로 2003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 람사르협약에 등록되었다. 갯벌 전체면적이 22.6㎢(690만 평)의 이르며, 5.4㎢(160만 평)의 드넓은 갈대밭에는 칠게와 짱뚱어가 자유롭게 뻘밭을 누비고 다닌다.
여의도 면적이 약 2.9㎢이므로 순천만 갯벌습지가 약 7.7배 정도 넓은 셈이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철새의 도래지로 유명하여 우리나라에서 파악된 철새 종류의 절반 정도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순천만의 일몰과 230여 종의 철새를 관찰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처럼 순천만 생태 습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갈대>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화포마을은 순천만의 남서쪽에 있다
갈대 / 고영민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 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고영민 시인의 <갈대>라는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전율을 느끼며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평소 순천만 동편에 자리 잡은 와온마을 앞 해변이나 서편에 있는 화포마을로 숱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느꼈던 내 생각은 우리 사관생도들의 모자 제복에 끼워졌던 그 깃털들에 가 닿았다.
겨울철새가 도래한 화포 해변
《문학사상》 2008년 1월호에 처음 소개된 이 시<갈대>는 제목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개>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의 갈대는 배고픈 짐승, 개 꼬리 그것이었다. 갈대를 한 번이라도 유심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그 비유가 유효 적절한지 탄식하며 공감할 수 있으리라.
화자가 바라본 갈대가 시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통찰의 깊이가 가져온 카타르시스적 교감이 형성되는 순간에 빠져들었다.
나는 잘 무르익은 과일처럼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환희를 맛보듯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였다. 그리고 순천만 화포해변 길에서 해 질 녘을 향해 걷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고영민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가 있고, 지리산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등 수상(자료출처: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