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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Jan 24. 2022

나의 애송시 (4) 사평역에서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나의 애송시 (4) 사평역에서 / 곽재구

     

지난 신축년 말, 순천문화재단의 이사로 활동 중인 분으로부터 문화행사에 대한 안내를 받고, 순천시가 주관하는 한 행사에 참석하였다가 김승옥 작가님, 곽재구 시인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김승옥 작가의 대표작은 한국 현대문학 사상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로 꼽히는 《무진기행》이라 할 수 있다. 《무진기행》은 작가가 23세에 쓴 단편소설로 산업화가 시작되는 1960년대의 배금주의와 출세 지향 등 수많은 사회적 병리 현상이 나타나는 시기에 쓴 소설이다. 소설은 자욱한 안갯속의 무진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허무주의적인 시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학창 시절 순천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설 속의 무진이라는 가상의 도시가 순천이 아닐까 하는 말이 한동안 회자되곤 하였다. 김승옥 작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순천문학관> 기행문을 통해서 다시 거론키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한 소개로 마무리한다.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沙平驛)에서〉 당선되어 처음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대체로 억압받는 서민들의 삶을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 속에서 남루하고 힘겨운 현실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현상들을 바라봄으로써 시가 따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당일 행사가 끝나고, 나는 두 작가님과 재단 이사 등 네 사람이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하고 잠시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 후 다른 장소에서 한두 차례 또 인사를 올릴 기회가 있었다. 인간관계란 이렇게 한번 맺게 되면 계속 이어지는 인연도 있고 강물 흘러가듯 기약할 수 없는 인연도 있으리라. 이러한 인연으로 두 분의 작품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시가 갖는 생명력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스며들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설명이 굳이 없어도 단순하지만 지난한 삶이라는 화두에 공감하고 내적 깨달음으로 인간 본성에 다가서게 하였다.      

곽재구 시인의 시는 1980년대 이후 문학계에서 대표적인 서정시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시는 나중에 임철우 작가가 <사평역>이라는 소설로 재구성한 바 있다. 소설 속의 '사평역'은 시골 간이역을 배경으로 어느 늙은 역장이 지키고 있다.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아홉 명의 남녀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쓸쓸한 삶의 단면을 그린 이야기이다.


곽재구 시인의 시에서는 이렇듯 서정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성향을 읽을 수가 있다. <구두 한 켤레의 시>가 그러하고 <성묘>, <가거도 편지>,  <받들어 꽃> 들이 그러하다.  


         

구두 한 켤레의 시 /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어름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 (중) ........

........ (략) ........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 덜그럭           



낡은 구두를 신고 고향을 다녀온 화자가 구두 소리에서 고향의 강물소리를 연상하고 있다.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는 출렁출렁하지 않고 덜그럭덜그럭 거린다.

곽재구 시인을 처음 뵌 날, 그로부터 가르침을 하나 받았다. “나와 친숙한 물건에 인사하기”였다. 평소 친숙한 것들과 자꾸 인사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게 인사를 해온다. 나는 이 말을 어떤 사물에 대하여 깊이 관찰해보라 의미로 가슴에 새겨 넣었다.           






※ 곽재구(郭在九, 1954 ~ ), 광주광역시 출생, 문학 작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사평역에서〉당선, 주요 작품으로 시집 《사평역에서》(1983), 《서울 세노야》(1990),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1999),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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