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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Feb 22. 2022

나의 애송시 (10) 나목(裸木)

- 나목 / 신경림

나의 애송시 (10) 나목(裸木) / 신경림



지난밤 눈이 제법 내렸었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밤새 내리던 눈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한겨울이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침나절의 따스한 햇볕에 이끌리어 슬그머니 나들이를 나섰다. 외투를 걸치고 한 시간쯤 거리에 있는 장성댐을 돌아볼 요량으로 집을 나왔다. 오래전부터 장성댐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늘 멀찍이 바라만 보았는데 오늘은 댐 둑 위에 직접 올라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미 목적지 정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 IC가 아닌 상사호를 끼고 지그재그로 천천히 달리는 지방도로로 방향을 잡고 차를 몰았다. 호반 상류에 이르러 선암사와 고속도로 진입로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가서 우측으로 달리면 고속도로와 연결된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라도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으면 종종 이 길로 우회하여 다닐 때가 있다.      


상사호 수변도로는 호수를 바라보며 제법 긴 세월을 보낸 울창한 벚나무 가로수길이 이어진다. 호수는 숲 속에 숨어있는 명경지수이다. 시절에 따라 조용히 산 그림자를 담고 있을 때가 있고, 벚꽃이 흐드러진 풍경 속의 푸른 배경이 되어줄 때도 있다. 눈처럼 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려 호수로 낙화하는 풍경은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바람은 잠자는 숲 속의 요정들을 깨워 때론 잔잔하게 때론 휘몰아치듯 격동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가을이 무르익어 갈 무렵, 봄날 부지런했던 나무들부터 수종마다 각기 지니고 있던 물감을 풀어 푸른 잎에 채색을 시작한다. 황홀한 색의 향연은 첫서리가 내릴 시점을 경계로 막을 내린다. 앙상한 가지에는 미처 떨구지 못한 마른 잎이 어쩌다가 눈에 띄는 모습을 뒤로하고 호반을 벗어났다.      



장성댐 아래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제법 넓은 주차장이 많이 비어 있다. 댐 주변의 산골짜기에는 서해안이 가까운 탓인지 밤새 많이 내린 눈이 녹지 않고 하얗게 내려앉아 쓸쓸한 겨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양한 농산물이나 먹거리를 파는 가게가 줄지어 서 있었지만 오늘은 커피나 호빵, 어묵 등을 파는 가게 두 곳만 영업 중이다. 따끈한 차 한잔을 들고 광장에서 댐 둑을 향해서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바람이 불어와 제법 쌀쌀하다. 옷을 단단히 입긴 했어도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임을 실감케 한다. 처음으로 올라와 보는 장성댐이 위용이 놀랍다.



장성댐은 높이 36m, 길이 603m이며 영산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73년 7월에 착공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댐의 형식은 중심점토 사력댐이다. 장성호는 장성읍 등 3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만수위 때의 수면면적 68.9㎢, 총저수량 8480만 t, 유역면적 122.8㎢이다. (두산백과)     



안내판을 보니 장성호 수변 길의 총길이는 34km인데 현재 조성이 완료된 길은 11km이다. 댐 둑에서 우측 수변길(출렁길)은 8.4km로 두 시간 정도 소요되고, 좌측 수변길(숲속길)은 2.6km인데 40분 정도 소요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온이 풀리면 산책로를 따라 한번 돌아보리라 생각하며 이번에는 댐 주위를 서성거렸다.

둑 위에서 바라보니 눈 내린 산골짜기마다 앙상하게 드러낸 나뭇가지들이 자못 쓸쓸하다. 지난 가을날 바람결에 날려 보낸 그 많은 잎사귀, 낙엽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옷을  벗어버린 나목들이 산정을 따라 등뼈와 갈빗대를 되는대로 모두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나목(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시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 출생하여 동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56년 『문학예술』의 「갈대」로 등단했다. 『농무』,『새재』,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의 시집과 『민요기행』, 『강따라 아리랑 찾아』 등 산문집이 있다.

그는 1970년대의 대표적인 민중 시인으로 꼽히며, 궁핍한 농민들의 삶이나 황폐한 광산과 노동자 등 힘없는 민중의 삶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신경림 시인은 농민의 삶 등을 주로 시의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 시의 저변에는 인간의 고뇌와 외로움 같은 정서가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녘 하늘 아래는 벌써 홍매화가 기지개를 켜고 붉게 물들 채 열어가고 있다. 전염병은 인간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봄은 잊지 않고 우리 곁에 찾아온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봄꽃들의 향연이 시작되리라.

예년처럼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아도 꽃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가 구름처럼 몰려와 대지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일 것이다. 겨울나무가 삭풍에 온몸을 드러내 놓은 채 잠자듯 조용히 움츠리고만 있던 마음을 열고 움튼 싹을 틔울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 마음에도 화창한 봄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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