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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Mar 18. 2022

나의 애송시 (12) 연서(戀書)

- 연서 / 프란체스카 도너 리

나의 애송시 (12) 연서(戀書)  / 프란체스카 도너 리     



러브레터, 연애편지를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 두근거리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동시에 몇 가지 추억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연서에 대하여 소환될만한 기억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1.

쉬는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아 다음 시간 교과서를 꺼내며 수업 준비하고 있는데 옆 반에서 동급생인 동식이와 태성이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잠깐 복도로 나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였다. 동식이는 우리 동네 사는 친구이고 태성이는 다른 동네에 사는 아이다. 평소 태성이와 잘 어울려 지내는 사이 아니었던 터라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따라 나갔다. 

복도에 나가니 동식이가 다짜고짜 내 왼쪽 가슴에 손을 턱 더니

“너, 엊그제 밤에 잠 안 잤지? ”하고 물어본다. 마치 다 알고 왔다는 것처럼.

“그게 무슨 말이?” 어리둥절한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반문했다.

그러자 태성이가 하는 말인즉, 우리 동네의 남학생이 <명>이란 한 글자 이름만 써서 여학생 <C>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C>로부터 <명>이 누구인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단다. 그리고는 “가운데 이름이 너랑 같으니 네가 보낸 것 아니냐? ”하고 재차 다그쳤다.

그제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속으로 ‘그것 때문에 이 친구들이 찾아왔구나’ 하고 비로소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부끄럽고 창피하여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능청스럽게 잡아뗐다.


사실은, 체육 시간마다 2층 교실 창가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이 운동장 서 있는 남학생들을 내려다보곤 하였다. 그중에 <C>라는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너무 청순하고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데다 마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착각하곤 하였다.

어느 날 밤 설레는 맘으로 손편지를 써서 보낸 후 3일쯤 지났을까? <C>의 회신 대신에 엉뚱한 친구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C>에게 내 이름을 제대로 밝혔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쑥스러워 차마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가운데 한 자만 써서 보낸 결과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극만 연출하고 끝났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알게 된 일이었지만 <C> 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녀석들은 몇 놈 더 있었다.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중2 때의 일이다.      


2.

요즈음 K-POP이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어서 마치 신세계를 대하는 느낌마저 든다. 예전에 음악을 들으려면 카세트 테이프나 LP를 사서 들어야 했다. MP3나 스마트폰은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1980년대 젊은이들을 라디오 앞에 앉게 했던 잔잔한 목소리의 주인공, 이종환 씨가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활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별밤> 음악방송은 주로 외국 팝송을 소개하고 애청자들의 사연이나 신청 곡을 들려주 젊은이들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나도 한동안 애청자 중 한 사람으로 특히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던 무렵, <별밤>이 송출될 시간이면 라디오 옆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외출했다가 귀가해서 라디오를 틀어보니 이미 <별밤>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연 하나가 유독 가슴에 와닿았다. 지금은 신청 곡도, 사연도 모두 희미해졌지만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DJ가 소개하는 내용을 듣다 보니 갑자기 음악 신청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대학교는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으로 학교와 학과, 이름을 같이 소개해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학교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요즘이라면 개인정보의 노출에 민감한 사안이지만 당시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 회신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보낸 첫 편지에 대한 회신은 1주일 만에 날아왔다. 그리고 그녀와 4년가량 주고받은 편지는 라면상자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양이 되었다.      


송광사 앞마당에는 지난해 핀 수국이 추억처럼 그대로 말라있다


3.

2년 전, 고향 선후배 10여 명이 함께 산행한 적이 있다. 그날 참가한 우리 동기들은 나와 병수, <K> 세 사람이었다. 병수와 <K>는 같은 마을 동창이었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관계로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굉장히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과정이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도란도란하며 힘든 줄 모르고 산에 올라갔다. 화제가 러브레터로 옮겨가자 문득 <K>가 그 흔하다는 러브레터를 한 번도 써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다며 많이 아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뜬금없이 그녀의 소원 풀이 삼아 누가 선뜻 그녀에게 연서를 보내주겠다 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동급생이었던 내게 숙제가 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학교 동급생이었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그녀와 한번 나누어본 적도 없다는 점이었다. 초등학교도 달랐고 통학하는 길도 반대 방향이었던 터라 추억을 공유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고민하다가 생각이 미친 게 러브레터와 연관된 영화와 서양화 이야기로 실마리를 풀어서 주섬주섬 몇 줄 적어 보냈다.      


<K> 에게 보낸 글   

 >>   https://brunch.co.kr/@beseto25/99


SNS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답게 e 문자 메시지로 보냈고, 또 그렇게 답신을 받았다. 러브레터라고 하기에는 좀 무엇하지만, 일단의 성의 표시에 대하여 감사의 의미가 많이 묻어나는 답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연서를 처음 접했던 순간 마지막 연을 읽으며 가슴 뭉클한 감명을 받았었다. 다음의 시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과 연애 시절 편지를 주고받으며 쓴 프란체스카 여사의 시이다.  


송광사의 노목(老木) 매화나무는 과하지 않을 만큼 꽃송이를 달았다



연서 / 프란체스카 도너 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이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 세상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교외에 있는 인처스도르프(Inzersdorf)에서 1900년 6월에 태어났다. 빈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0년에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였던 헬무트 뵈링(Helmut Boehring)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했다. 이승만 역시 이때는 전처 박승선과 이혼 후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1992년 3월에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립묘지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 합장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한국인이라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다들 잘 아는 바이므로 여기에서는 논외로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 역시 주변인들로부터 평가가 엇갈린다. 다만 통역사와 타자나 속기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어서 대통령을 보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내조에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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