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소식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 단풍 소식은 반대로 북에서 남으로 이어진다. 올해도 여전히 역병과 불안한 동거 중이나 화창한 봄이 꽃님을 앞세우고 찾아와 잠시나마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어 감사하다.
지금은 벚나무들이 겨우내 강둑이나 길가에 맨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시간에서 깨어나고 있다. 모두가 신나게 꽃단장을 하고 꿀벌과 나비들을 불러 모은다.
매화나무는 곳곳에서 재배되고 있다. 그중에 재배 규모가 큰 곳은 광양으로 전국 생산량의 23% 이상인데, 특히 다압 일원이 섬진강을 끼고 있어 아름다운 봄나들이로 적격이다.
산수유의 산지로는 전국 생산량의 70%인 구례 산동을 꼽을 수 있다. 광양과 구례는 인접해 있는데 3월 초부터중순 무렵에 이르러 만개하는 매화와 산수유꽃이 연출하는 꽃 대궐에 입궁하려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상춘객으로 해마다 진입로는 몸살을 앓는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역병의 영향으로 예년과 달리 대대적인 꽃 축제를 개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꽃나들이를 하고 간 듯하다.
대두라도 섬의 매화꽃
매화꽃이 지고 나면 6월 말경 매실을 수확한다. 매실은 배탈이나 식중독 등 소화불량과 같은 소화기 계통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실은 매실청, 매실장아찌는 기본이고, 아이스크림을 비롯하여 고추장, 초콜릿, 막걸리, 돈가스, 콩국수 등 식자재로 얼마든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한편 산수유 열매는 약재로 널리 쓰이며 구례의 특산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열매를 말린 제품이나 산수유환, 산수유즙, 산수유차, 산수유주 등이 있는데 간장과 신장, 두통, 이명 등에 유효하다. 특히 타닌, 사포닌과 칼륨 성분 등이 많아서 고혈압, 동맥경화 예방에 효과가 있다. 회춘하고 싶다면 산수유 제품을 많이 드시라고 권한다.
그런데 이 산수유가 구례지역에 유독 많이 재배된 사연을 들어보면 옛날에 중국 산동(山東)의 아가씨가 구례 총각에게 시집올 때 산수유 묘목을 가지고 와서 심은 것이 인근에 퍼졌고, 마을 이름도 산동(山洞)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구례 계척마을 시목(始木) 공원에는 중국 산동성 여인이 가져와 심었다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고목이 마을 수호신처럼 당산나무 역할을 하며 의젓하게 서 있다.
매화꽃이 필 무렵에 산수유꽃도 만개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예전에 같은 직장에 다니던 지인 중에 구례 산동 출신이 있었다. 한국 대학에서 중국어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산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할 때에 산동성 출신의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그의 아내는 현재 국내 대학의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구례 산동 출신의 또 다른 지인이 있는데, 서양화를 전공한 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여류화가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의 과육과 씨앗을 분리하는데 앞니로 까는 작업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시큼한 열매를 깨물어 씨앗을 빼내야 하는 작업이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녀의 집안은 산수유 열매를 많이 수확하였는데 여자아이임에도 산수유나무를 잘 타고 올라가 열매를 손바닥으로 훑거나 한 알씩 따는 데 한몫하였다.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큰 대접으로 한 그릇의 씨를 발라낼 경우, 1970년대 초 당시 돈으로 10원의 작업비를 지급하였다고 하니 작업 속도가 빠른 사람은 그만큼 수입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생각만 해도 신맛의 느낌으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몸이 움츠러드는 느낌이 든다.
이제 막 노오란 산수유 꽃봉오리가 열렸다
홍니 / 안도현
지리산 아래
구례 산동 마을 처녀들 중에는
홍니를 가진 이가 많았다고 한다
눈 내리는 겨우내 누룩 냄새나는 방 안에서
산수유 열매를 몇 날 며칠 까면서
이빨에 그만 붉은 물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눈 내리는 날이면 지리산 아래
구례 산동 마을 옛 처녀들 보고 싶어진다
누구를 기다리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샜냐고,
그이는 산 넘어 돌아왔느냐고,
겨울밤 눈 내리는 산동마을에는 처녀들이 방안에 둘러앉아 도토리만 한 산수유 열매를 입으로 가져가 씨앗을 분리하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치아가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동 처녀와 입맞춤을 하면 보양식 먹는 것보다 낫다는 우스갯소리가 지금까지 회자되곤 한다. 안도현 시인의 홍니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요즘에는 산수유 씨앗을 빼내는 기계가 있어서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하여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였고,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북항』 등 11권의 시집을 냈는데, 그의 시는 따뜻하고 감성적인 서정시가 많다. 아울러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물고기 똥을 눈 아이』, 『고양이의 복수』, 『눈썰매 타는 임금님』 등 여러 권의 동화책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