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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우 Jun 12. 2020

K에게

#러브레터(戀書)

언젠가 그 집 앞을 지날 때
낙엽이 하나둘씩 질 때
아주 오래된 기억 저편에
우리 둘이었던 날
한참을 바라보던 그 길에
어느새 찬바람이 불면
긴 시간 너머 살아오는 날이
이젠 너무나도 아른거려와
그 추억들은 모두 지울게
그 시간만은 남겨놓을께
.....


강풍과 더불어 비 내리는 출근길 아침. 라디오에서는 올드미스 가수가 아주 <오래된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듯 열창한다. 오래된 기억이 항상 애틋한 느낌일 수는 없지만 날씨 탓인지 뭔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다. 가슴을 뛰게 할 만한 어떤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어쩌다가 노래연습장에 가면 ‘어니언스’의 ‘편지’를 곧잘 선곡한다. 여기에서 편지는 《러브레터》, 연서(戀書)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오겡키데스까’라는 공전의 히트 유행어를 낳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호평을 받고 한국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린 사랑, 작별도 없이 홀연히 떠나 가버린 사랑이 그 속에 있었다. 그리고 마치 미완의 유화 작품 위에 다른 색으로 덧칠하듯, 동명이인에게 잘못 전달된 편지 한 장이 새로운 인연으로 연결되는 여주인공의 일상을 그린 영화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못하였고 한참 후에 책으로만 읽은 게 상당히 아쉬움으로 남아 다. 스토리의 전개 과정에서 느꼈던 감흥은 영상에서도 비슷했을까?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도 낯이 익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연애편지》라는 작품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다. 

네덜란드에 가서 원본을 본 적도 없고 그저 친절한 해설이 담긴 그림 사진을 보면서 겨우 이해할 따름이다. 네덜란드의 풍속 화가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17세기 작품으로 안주인과 하녀 두 여인이 그려진 그림이다. 하녀가 편지를 건네주자, 현악기 ‘류트’ 연주를 멈추고 여주인이 조용히 편지를 받아 든다.

그림 속 실내에는 바다 풍경화가 걸려 있다. 폭풍우 치는 바다, 류트, 벗어 놓은 실내화, 비스듬히 기대 놓은 빗자루 등을 통해 은밀한 연애를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연애편지란 사실 은밀해야 제 맛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SNS가 발달한 이 시대에 우리들 나이쯤 되면, 오글거리는 편지는 식상하다. 나이가 들면 사물을 바라보는 느낌이 달라지고 생각도 바뀌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 이리라. 우리들의 인식 여부에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듯 조금씩 그렇게 변한다.


아무튼 우리가 삶의 시공을 공유하고 있던 그 시절, 나는 이른 아침에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 신작로까지 나가려면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과 밭두렁 길을 지나며 바짓 자락으로 아침이슬을 털면서 등교했다.

그리고 늦은 저녁시간의 하굣길에는 어둠 속에서 허옇게 드러났지만 마음으로 더 익숙해진 오솔길을 따라 외딴집을 찾아 들어갔지. 이미 보금자리에 깃든 산비들기나 소쩍새, 부엉이의 처연한 울음소리를 동무삼아 들으며 걸었다. 아직 인생의 목표로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따위는 상상도 못 했던 때이다.

그 나이 또래가 대체로 그러했겠지만 흘러가는 시간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각 없는 삶, 그저 그런 나날이 연속이어서 그 무렵의 나는 조용한 방관자였다.

다만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것은 겨울날 눈 덮인 산속을 메리와 해피랑 뛰어다니 하루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여름 저녁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뒹굴며 밤하늘 은하수가 남북으로 길게 드리워 금방이라고 쏟아질 듯한 별빛이 수놓은 저 먼 우주의 어느 공간을 방황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던 기억만이 뚜렷할 뿐이다.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고교시절을 보냈고 상경하여 대학에 적을 두었지만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도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 시절 서울의 거리에서 만나는 전경(戰警)들이 젊은이들의 가방 뒤지는 무법함, 대학가에는 최루탄 가스의 메케함이 수시로 떠돌며 슬픈 시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동안 잠시 귀국하여 같은 시골 동네 살았던 여자 친구 <H>를 서울시내에서 만났다. <H>는 이미 대학을 마치고 모대학 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헤어지려는데 마침 중학교 여자 동창 <K>와 약속이 있으니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고 하였다.

<K>...?

그래 곱상하게 생긴 친구가 생각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K>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일행이 있어서 <H>를 따라나서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그대로 헤어졌다. 돌이켜 보면 졸업 후 삼십 년이 도록 그것이 유일기회였다. 

그 후 또 상당한 시간이 흘러 몇 해 전 모임에서 <K>를 만났다.

그때부터 동창들임이나 경조사 등에서 간혹 <K>났지만 서로 변화된 모습에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를 나누었다. 최근에 학교 앨범 속의 <K>를 확인하고 비로소 신원을 파악하였으니 세월이 퍽이나 무심하게도 흘러갔다. 그동안 <H>는 우리들의 곁을 영원히 떠나갔구나.


일전에 친구들과 함께 오른 일요 산행은 새로운 추억을 새기는 공간이 되었다. 그날 나는 <K>가 경험하지 못한 것-연애편지-에 대한 동경을 풀어 주어야 할 과제를 하나를 받아 들었다.

어떻게 그 숙제를 풀어야 할까 한동안 고민한 결과는 이렇듯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나는 최소의 성의 표시를 해주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함께 하지 못했던 것들에 아쉬움을 달래려고 한다.


다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은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이제 가끔씩 뒤도 돌아보면서 살아가야지. 때로는 산 오르고 물도 건너가며 씩씩하게 걸어보자. 나는 현재의 직장에서 업무차 국내외로 빈번히 출장을 다녔는데 일선에서 물러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생각도 든다. 먼길을 가는 데 동행하는 길벗이 있어야 외롭지 않다고 했던가?

<K> 친구!

언젠가 기회가 오거든 선글라스도 하나 장만해서 멋을 부리며, 고상하게 팔짱을 끼고 함께 가보자. 저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연애편지》라는 명화를 감상하러...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와 연애편지(The Love Letter),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네덜란드


사진 출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https://m.terms.naver.com/frame/entry.nhn?docId=5743460&cid=63854&categoryId=63854


오래된 기억 / 이은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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