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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Dec 12. 2021

나는 강남의 배달원이외다

1화 : 강남의 도로는 전쟁터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강남의 도로 한복판 위로 처음 출근한 날, 내 머릿속을 스쳐간 건 다름 아닌 <미생>의 한 대사였다. 테헤란로의 빌딩숲 사이로 지난주까지 걸어서 출퇴근하던 전 회사 건물이 보였다. 헬멧까지 뚫고 들어오는 11월 매서운 북서계절풍의 한파와 함께 비로소 내 선택의 대가를 또렷이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 난 이제 배달원이다. 그것도 전업.


배달원의 일상이 매일 지옥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이 단순하여 스트레스가 없다. 하루 10시간 내내 드라이브하는 게 일이라 마음은 편하다. 몸이 좀 고생하지만. 또 서울 시내 구석구석을 바람처럼 휘돌아 다니며 답사할 수 있는 기회까지 누릴 수 있다는 점은 기대하지 못했던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덕분에 배달을 하며 강남 3구(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의 대략적인 지리를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여자친구랑도 안 가본 코엑스 지하상가를 하루에도 2~3번씩 들락거리기도 하고..


일 자체의 어려움보다 내게 큰 변수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강남의 도로가 말 그대로 전쟁터라는 사실이었다. 서울 도심 어느 곳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강남의 도로는 배달원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었다. 특히 출퇴근 시간(러시아워)에는 방심하는 순간 까딱하면 요단강 건 갈 수 있겠다는 사실을 몸소 배우며 하루하루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날마다 배달을 한 건씩 할 때마다, 여기엔 내 위험(생명)수당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각인된다.


아, 4대 보험의 푹신함이여, 네가 그립다.


매일 참전하며 볼 수 있게 된 새로운 도로 위의 세상이 있다. 차도에선 존재하는 모든 이륜차와 사륜차가 보이지 않는 힘 겨루기와 눈치 싸움을 한다. 때론 반칙도 서슴지 않는다. 잔뼈 굵은 베테랑 운전자라고 할 지라도 언제 어디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안전 운전을 하지만, 유독 강남에는 도로 위의 무법자들이 많은 것 같다. 슬프게도 그 무법자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대상이 바로 나처럼 배달을 하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이다.



내가 경험한 바 도로 위에는 세 부류의 두목들이 있다. 먼저 가장 조심해야 하는 대상은 앞서 말한 배달 오토바이다. 시간과 욕망에 쫓기며 한 건이라도 더 빨리 배달하려는 그들에게 서행은 지키기 어려운 이상에 가깝다. 정말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다음은 택시다. 특히 손님을 태우지 않은 빈차가 무섭다. 거리를 유지하며 택시를 따라가다 보면 급정거를 하거나 옆 차선에서 내 차선으로 순식간에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기사가 손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택시는 언제나 충돌 위험이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야 한다. 다음은 버스다. 버스가 위험한 건 그 커다란 몸집 때문에 커다란 사각지대가 존재해서다. 버스의 뒤꽁무니에 붙어 있던 오토바이가 버스를 추월하려다 미처 오토바이를 보지 못한 버스와 충돌한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그 이후로 버스 뒤에 있을 때는 항상 버스의 사이드 미러가 보이는 쪽으로 서 있게 된다.


믿을 건 너희뿐이야. 무사히 함께 가자.


강남의 도로 위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들의 응축된 감정과 감춰진 본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인 것 같다. 내가 뛰어든 이 전쟁터에서 나는 무사히 살아남아 귀환할 것이다. 그리고 웃으며 떠날 것이다. 다시금 <미생>의 대사가 떠오른다. 그래 난 아직 미생이다.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버텨 보자.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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