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6.25는 '북침'이었다
한국사회 정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구한말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외계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분단 70여년의 이질감은 너무도 컸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오면서 어머니 앞에서 한 다짐을 지키고 소중한 내 인생을 허비할 수 없어 열심히 살았다. 아르바이트와 현장일도 하면서 한국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나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띠동갑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학생들과 공부를 하면서 그들에게서도 배웠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사단법인에서 일하다가 지자체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날의 감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안고 살 것이다. 허물 많고 이 나라의 번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나지만 “먼저 온 통일미래”로 품어주고 믿어준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다.
당시 지자체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6.25전쟁 납북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관련 업무였다. 6.25전쟁 당시 북한은 10만 여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납북했다. 그 가운데는 제헌국회의원들도 있었다. 정치인, 언론인, 과학자, 기술자들도 있었다.
출처: 이북5도 신문
결자해지란 말이 있다. 비록 직접 가해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북한출신, 특히 북한군이었던 내가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 까 싶었다. 이미 수 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자료도 부족하고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는 단 한사람의 증언이라도 더 확보하고 강제납북의 실상을 바로 파헤쳐 납북되신 분과 그 가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로 뛰고 또 뛰었다.
그 과정에 6.25전쟁 관련 역사지식과 열정으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 납북자분들의 명예회복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 그리고 다른 동료의 실수로 납북자 명단에서 제외될 뻔해 불만을 가졌던 피해자 가족의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찾아뵙고 진심어린 사죄를 해 응어리를 풀어드리기도 했다. 그 동료는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도청에 신규임용된 공무원이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임용된 공무원답게 업무 능력이 뛰어났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감탄할 때가 많았고 배울 점도 많았다. 다만 6.25전쟁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나보다 조금 모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6.25전쟁 이전에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가 전쟁으로 인한 공방전으로 남북한의 관할지역이 달라진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그 동료가 잘못 알았던 부분을 내가 바로 캐치해내자 신기하다는 듯 "주사님은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북한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김일성 혁명역사에서 다루는 데 혁명역사는 중요과목이고 학교와 군대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쳐줘서 안다"고 답했다. 북한 정권의 역사 가운데는 왜곡된 부분이 많고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제일 쓸모없는 배움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업무에서 조금은 도움이 돼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다.
출처: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
관련 업무를 하면서 말씨 때문에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으나 정성어린 상담과 직접 찾아가 솔직하게 북한 출신이라고 밝히고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다보니 오히려 격려를 받는 일도 많았다. 6.25전쟁 때 북한에 납치된 한 제헌국회 의원 가족의 신고를 받았지만 소명 자료가 부족해 며칠 동안 자료를 발굴한 끝에 해명해냈고 북한에 묘역이 조성돼 있다는 자료도 찾아 가족에게 알려드렸다. 이 같은 진심과 부서 공무원들의 노력으로 내가 근무하던 지자체는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높은 6.25전쟁 납북피해자 신고 및 명예회복 업무실적을 올렸고 피해자 가족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그분들의 가슴속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면서 나도 긍지와 자부심을 많이 느꼈다. 6.25전쟁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죄스러운 마음에 위축됐던 내 마음에도 빛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