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ne Oct 27. 2019

내 운명의 주인

2012년 000 믿음 수기 공모전 수상작

추억의 상념에 잠겨 저 멀리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생의 굽이마다에 고단했던 내 삶의 발자취가 깊숙이 새겨져 있다. 내 고향은 한반도 북단의 한 국경도시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나와 우리 가족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직장에 배치되신 부친을 따라 평양 교외의 한 소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학창시절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장군님의 병사”, 90년대 “통일 병사”를 부르짖으며 의기양양해 군에 입대했지만 그것은 한낱 치기일 뿐이었다. 고된 훈련과 작업, 굶주림에 시달리고 휴가와 외박도 없는 10년간의 병사생활은 청춘의 값없는 소진이었다. 군종과 부대배치에서부터 비리가 들끓었다. 그리고 병사생활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영웅담과 위훈으로 별처럼 빛나는 멋진 나날이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나의 청춘도, 꿈과 이상도 시들어 갔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 그런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군에 입대할 때 부모님 앞에 다졌던 맹세를 되새겼고 나 자신에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 굳은 마음을 먹었다. 뒷 배경도 없고 소심한 성격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군 생활에 참가하였고 훈련과 정치학습을 열심히 했다. 다행히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고 운도 좋아 군 생활 3년 만에 정치부 서기로 발탁되었고 6년만에는 5, 6년차 선배들보다 먼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6년 만에 처음 다녀 온 고향집에서 나는 또다시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 당시 북한을 휩쓸던 경제난과 식량난의 여파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굶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대학진학의 꿈을 접고 마음에도 없던 장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운명은 참 기구하고 슬픈 것이었다. 급변하는 사회 환경은 그 구성원들의 삶과 가치관,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그 것이 내 운명의 길이라면 도망치지 않고 현실에 맞서 꿋꿋이 걸어 가리라던 내 결심은 그로부터 5년 만에 또다시 고비를 맞게 되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실무편람을 외우며 열정을 다 불태운 보람으로 업무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야심차게 사령부 진출을 꿈꾸던 나에게 인생의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고 나는 한국행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되었다.


                                                                            출처: KBS 뉴스


진정한 희망과 미래가 없는 그 사회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나는 목숨을 걸고 한국행을 선택했다. 북한 땅에서의 내 삶에 종지부를 찍고 어둠이 깃든 두만강 가에서 공포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차디찬 11월의 강물을 헤갈랐다. 중국공안의 체포와 북송에 대한 불안감으로 하루가 한 달 같았던 1년만의 은거생활 끝에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을 경유하는 1만 3천 킬로미터의 머나먼 여정을 거쳐 드디어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심정은 환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운명적 도전과의 마주함이었다. 한국행에 성공했다고 내 인생 자체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는 내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막연한 동경과 기대만을 안고 찾아왔던 한국에서의 삶은 그렇게 녹녹하지도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환상과 대우를 바라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출발선 자체가 달랐던 사람들과의 동일한 경쟁과 일부의 편견어린 시선은 여간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진학도 취업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그래, 당연한 거야. 그래서 여기 사람들보다 백배, 천배 더 노력해야 하는 거야”라고 필연을 강조해 봐도 위안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외로움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병사생활 7년, 장교생활 5년을 거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머나먼 여정을 통해 이 땅에 정착한 나였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차디찬 동토의 땅에 남겨두고 성공과 기약 없는 만남을 눈물로 뜨겁게 맹세했던 분단 한반도의 비극적 운명의 체험자였다. 여기서 좌절하고 무너진다는 것은 소중한 내 인생과 부모형제에 대한 부정과 배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행은 무엇보다 내가 한 선택이었다. 나는 다시 군에 입대했다는 마음가짐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했던 그 초심이라면 못해낼 일이 없을 것이었다. 몽골의 국경에서, 동남아의 이름 없는 강가에서 스러져간 동포들의 한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실망과 좌절은 배부른 흥정이고 사치일 것이었다. 


나는 분연히 일어섰다. 수개월간의 현장노동과 주경야독으로 나는 생활비도 벌고 컴퓨터, 영어기초지식을 익혀갔다. 3수 끝에 대학에도 진학했고 띠 동갑 이상 차이나는 학생들과 한 책상에 앉아 지성의 탑을 쌓아갔다. 수강신청 등 모든 것이 북한과 다른 대학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자존심을 다 버리고 부끄러움을 잊은 채 모를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시험기간이면 밤을 새워가며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 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외국어 사관학교과정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참가해 영어공부를 했다. 눈물과 노력이 깃들어 더욱 값진 대학졸업증도 받았고 조그마한 사단법인 기획팀원으로 시작해 수도권 지방자치단체 계약직 공무원도 되었다. 업무에도 열심이고 작은 나눔과 이웃사랑도 실천해가고 있다. 나는 내 삶의 궤적으로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통일의 당위성을 노래하고 남북한 사회통합의 불씨가 되고 싶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다. 


아직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더 큰 희망과 꿈에 목마르다. 떠날 때 품었던 꿈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꿈, 열정으로 살아 온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니까. 나는 나를 믿는다.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소중한 내 인생의 2막을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열심히 살 것이다. 세상의 성공과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는 내 삶이지만 재북가족과 재회하는 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당차고 떳떳하게 살아 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깝고도 먼 곳에 계신 아버지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