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은 역사의 회고이다. 고분은 역사의 단서이다. 한 개인의 영욕과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응축된 역사의 결정체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생명의 다 함과 함께 멈춰진 그 자리에서 고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분 속에는 역사가 잠들어 있다. 그 잠을 깨우는 것은 우리들이다.
천년고도 경주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고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귀족층의 대형 고분들이 밀집돼 있는 대릉원이다. 고대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구성했던 신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 존속한 왕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992년 동안이나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인구는 90만~120만 명에 달해 당대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서 깊은 도시인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 경북매일신문
대릉원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천마총이다. 천마총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으로 천마도와 금관, 금모를 비롯해 1만 여 점이 넘는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신라(新羅)라는 국호 자체가 서기 503년 지증왕 때 정해졌다고 한다.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고분 앞에 서 있노라면 절로 엄숙해지고 경건한 마음까지 든다. 앞선 시대를 산 고분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죽어서도 당대의 권세와 영광을 후세에 재현하고 싶었던 욕망이 봉분이 되어 우리가 보는 이 고분이 된 것일까? 아니면 아마도 풍수지리 학자들의 고언에 따른 명당자리였을 이 곳에 영면을 위해 ‘짐의 장지를 정하노라’고 하명했을 것인가? 대릉원 자리의 첫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 뒤를 이어 왕이 됐던 이들은 선조가 묻힌 이 곳에 신라왕조의 관행처럼 묻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대릉원에 자리한 고분들은 잔디로 덮여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푸른 언덕이 봉긋하게 솟아있는 것 같다. 잔디는 굳센 생명력이다. 봄이면 파릇파릇 뾰족한 잎을 곤두세우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면 잔디는 푸른 기운을 잃고 동면할 채비를 한다. 겨울 잔디는 바싹 말라 볼품이 없다. 그냥 검불 같다. 하지만 봄이 오면 잔디는 다시 일어나 생명의 잎새를 펼친다. 잔디는 갖은 밟힘에도 다시 복원한다. 화마가 불태우고, 설한풍에 얼어도 봄이면 다시 생명의 꿋꿋함과 신비를 증거한다. 폭우에 휩쓸려도 뿌리가 박혀있는 한 살아난다.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어디로 떠밀려 가도 새롭게 시작한다. 그런 잔디가 고분을 촘촘히 덮고 있다. 잔디는 현생에 재림한 충신들과 호위무사들인가 보다.
고분 주인들은 그런 것을 바랐을까? 고분은 역사의 천지풍파 속에서도 고난과 영광을 반복하면서 꿋꿋이 살아남아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그러면 죽어서도 사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영생불사를 끝없이 갈구하고 그를 위해 몸부림치기도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욕망을 위해 부하들이 불로초를 찾아 전 세계를 헤매도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진시황도 죽어 거대한 피라미드 모양의 능에 묻혔다. 진시황이 죽어서도 그를 지킬 병마용이 도열한 지하궁전에 잠들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봉분은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잊혀 지지만 왕릉 같은 대형고분은 정치투쟁의 굴곡과 자연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건재해 역사의 증인으로 그 존재를 입증한다.
고분은 역사의 수난자이다. 통치자의 치세에 원한이 없을 수 없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정적을 만들어 낸다. 자원의 배분과 총애, 치정, 논공행상... 그 모든 권력 행사의 뒤에는 불만과 분노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그 불만과 분노가 합체돼 큰 구심력을 갖게 되면 역사의 향방이 바뀐다. 고분이 파헤쳐지고 그 주인은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 고분을 돌볼 후손이 절멸당하는 화를 입기도 한다. 고분을 지키라는 의미로 당대의 석공들이 정성들여 만들었을 수호상들도 소용이 없다.
고분 속에 잠든 주인들, 그리고 그 고분을 만든 후손들의 바람은 아마도 숙면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군주의 일생은 불면과 불안감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다. 권력이 주는 단맛의 뒤끝은 가끔 소태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때론 호미난방이었을 것이다. 군주의 죽음은 그 마약 같으면서도 버겁던 권력이라는 ‘굴레’에서의 해방이기도 했을 것이다. 죽어서는 국사 의논과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 세자 간택의 고민, 독살과 궁중 쿠데타의 두려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편한 잠에 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굴레는 한 사람에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이전되는 것이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DNA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권력의 욕망 또한 유한하다. 그 권력의 욕망은 역사를 소환한다. 그래서 역사는 당대의 권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다시 쓰여 진다. 역사의 재편찬에는 고분의 주인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의 권력을 밟고 올라서야 부각되는 반정 군주나 핏줄과 촌수 때문에 꼬이고, 권력투쟁에서 패했던 부활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속 좁은 군주는 고분을 파헤침으로써 사적 분노를 표출하고 자신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고분의 주인을 망신시켜 자신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늘 뒤바뀐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통치이념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를 재해석한다. 부나비가 불에 이끌리듯, 힘과 영광을 지향하는 사가들에 의해 역사는 당대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조리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조차도 후대에는 재평가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고분은 과거를 대표한다. 당대를 호령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군주와 권세가의 영욕과 일대기가 부장품과 역사서를 통해 재조명된다. 고분은 과거의 기록이자 미루어 앎이다. 고분의 어떤 주인이 후대에 호평을 받는가? 당대의 성인군자로 치세를 이끈 군주는 당연히 후대에도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어리석음과 과욕으로 국난을 자초하고 백성을 괴롭힌 군주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비난을 면치 못한다.
출처: 순천캘리그라피_하유글씨문화연구실
오늘을 후세 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위정자들이 한없이 겸손해져야 할 이유이다. 좋은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한 국가를 움직이는 권력의 행사가 초래하는 나비효과의 명암은 극명하다. 영광이 될 수도 있고 파국을 낳을 수도 있다. 개인의 영광이 꼭 국가의 번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고분은 어머니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금시라도 벌떡 일어나 생명의 젖샘이 되어줄 것만 같다. 그런 신라의 고분은 인간과 자연을 가장 닮아있다. 부드럽고 온유한 모양이 뾰족한 사각뿔 형태의 이집트 피라미드, 미주대륙의 피라미드와는 다른 모양이다. 고구려와 백제에도 피라미드 모양의 고분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의 고분은 자연적이면서도 모정을 닮은 부드러운 곡선미로 유려하다. 그 시대 신라 사람들의 마음과 정, 그리고 내세에 대한 가치관을 닮았을 고분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발호하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는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천년 왕조와 문화를 꽃피워냈다.
오늘날 동북아는 물론이고 동남아와 중남미, 유럽과 미국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한류를 보면서 경제 패권, 군사 패권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으로 전 세계를 ‘평정’한 한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에 새삼 어깨가 으쓱인다.
신라는 오늘날 한민족의 정신과 유산, 문화의 뿌리이다. 그 후손들이 오늘날 민족사상 가장 큰 영광과 번영을 누리고 있다. 작금에는 그 영광과 번영이 위기 앞에 마주 놓였지만 그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천년고도 경주의 신라 고분 앞에서 그 주인들과 우문현답을 나누고, 오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