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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pr 04. 2024

우울증 졸업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37

연달아서 네 차례나 늘렸던 에스시탈로프람의 복용량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았고, 매일 먹던 약에서 벤조디아제핀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그 즈음부터, 처음에는 없을 것만 같았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내심 노력했습니다. 한때나마 워낙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던 탓인지 다시 제가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믿기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약의 복용량은 다시 네 차례에 걸쳐 천천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 전, 의사분이 웃으며 이야기하시더군요. 


"졸업입니다. 약은 이번 달까지만 먹는 걸로 하고 그 이후로도 별일 없이면 이제는 안 오셔도 됩니다."




딱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제 상태가 최악이었던 시기가 말입니다. 그때는 모든 세상이 나를 향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었고 내가 지금 있는 곳과 가야 할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일평생 그렇게 끔찍했던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니체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딱히 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여전히 괴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저는 과거의 나 자신과 조금쯤 달라지긴 했습니다. 강해지지는 않았더라도 변하기는 했습니다. 조금쯤은 더 넉살이 좋아졌고, 조금쯤은 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액셀을 밟아야 할 때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생각해야 할 때와 잊어야 할 때를 가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무의식중에 이루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지만 동시에 항상 변화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은 사람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우울증이 나았습니다. 




치료를 시작했을 무렵, 저는 의사분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약을 먹어야 하느냐고요. 의사분은 알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달일 수도 있고, 일 년일 수도 있고, 십 년일 수도 있고, 평생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에 저는 하마터면 짓이겨질 뻔 했습니다.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약을 먹어야만 하는 상태 그대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단지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처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의사분이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미래를 예단하지 말고 일단은 지금의 상태를 치료하는 데 전념하자고 말입니다. 저렇게까지 멋들어지게 말한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런 취지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결과적으로 딱 일 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니만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저는 그때의 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분들에게 의사분의 조언을 그대로 옮기고 싶습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지 말고, 과거의 일에 얽매일 필요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미래가 보일 것이라 믿습니다.  


필요하다면 더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아프면,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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