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인물들 20
요화는 자(字)를 원검(元儉)이라 하며 본래 이름은 요순(淳)입니다. 형주 남군 중려현 사람이지요. 연의에서는 황건적의 잔당 출신으로 묘사되며 관우가 다섯 관을 돌파하던 도중에 만나는 걸로 설정되었습니다만 실제와는 전혀 다릅니다. 아마도 형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있던 시절에 임관하여 그의 주부(主簿. 비서관)가 되었고, 손권이 형주를 습격하여 관우를 죽였을 때 포로로 잡혔습니다. 하지만 요화는 기지를 발휘하여 병들어 죽은 척해 감시의 눈길을 피하다가 노모를 모시고 서쪽으로 도망칩니다. 혼자서도 도망치기 힘들었을 텐데 늙으신 어머니까지 모시고 갔다 하니 대단한 효자였던 모양입니다.
그때 마침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형주로 진군해 오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요화를 만난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요화를 의도태수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즉시 한 갈래 군사를 나누어 주어 지휘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이릉 전투에도 참여하게 되었지요.
유비가 크게 패하여 촉한의 장수들이 몰살당할 때도 요화는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이후 익주로 간 요화는 제갈량에게 발탁되어 승상참군(丞相參軍. 승상에게 속한 참군)이 됩니다. 제갈량은 자신의 승상부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특이하게도 상당히 많은 이들을 참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아마도 나랏일 전반을 죄다 돌보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제갈량이 업무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그렇게 한 걸로 추측되는데요. 각 분야의 전문가인 참군을 여럿 두어 자신을 보좌하도록 한 것이겠지요. 여하튼 제갈량 아래에서 참군을 역임한 이들은 장완, 비의, 양의, 장예, 왕평, 마충 등으로 그야말로 쟁쟁한 인물들입니다. 물론 마속이나 이막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여하튼 요화가 승상참군으로 발탁된 건 제갈량에게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요화는 독광무(督廣武)가 됩니다. 광무(廣武)현을 감독(督)한다는 뜻인데 대체로 해당 지역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며 그곳을 수비하는 지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광무현은 음평군에 위치해 있어서 북벌의 최전선이라 할 만한 곳이었기에 요화가 제갈량의 북벌에서 활약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겠습니다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요화의 기록은 제갈량의 사후에 다시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38년, 음평태수로 임명된 요화가 위나라를 상대로 공격에 나섰습니다. 당시는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이 대장군으로 있던 시절인데, 마침 요동에서 공손연이 위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유선은 장완에게 명하여 대장군부를 개설하고 위나라를 토벌하도록 합니다. 장완은 예전의 제갈량처럼 한중에 주둔하면서 북벌 준비에 착수하죠. 그러니 요화의 공격은 그 전초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옹주자사 곽회는 광위태수 왕윤과 남안태수 유혁을 보내 요화를 요격토록 합니다. 거칠게 계산하자면 태수 한 명과 두 명이 맞붙은 격입니다. 병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왕윤과 유혁은 요화를 공격하여 그가 주둔한 산을 동서로 포위했을 뿐만 아니라 요화의 바깥쪽 방어선까지 부숴버립니다. 곽회가 황제 조예에게 표를 올려 적을 격파하는 건 아침 아니면 저녁의 일이라고 자신할 정도로 위나라가 유리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요화는 불리한 와중에도 적이 분산된 틈을 노려 오히려 공세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유혁을 격파하고 왕윤을 죽이는 등 실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전과는 단지 전술적인 승리에 그쳤을 뿐, 본격적인 북벌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248년에 다시 요화의 이름이 사서에 등장합니다. 이 시기에 촉한의 위장군(衞將軍) 강유는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여러 강족들을 지원하여 위나라의 옹양주 일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음평태수인 요화 역시도 강유와 행동을 함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원에 나선 촉한의 군사들이 상당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족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만 강족의 유력한 수령인 치무대를 비롯한 여러 강족들이 촉한으로 귀순하는 성과는 있었지요. 이때 요화는 군사 요충지인 석중산이라는 곳에 성을 쌓아 지키면서 강족의 패잔병들을 거두어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곽회의 공격을 받았지만 강유의 구원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249년에 강유는 또다시 북쪽으로 진출합니다. 강유는 요화를 등애와 대치하도록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가서 도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등애가 그걸 간파하고 먼저 군사를 물리는 바람에 속절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북벌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동안 요화의 지위는 계속해서 높아져, 마침내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장익과 동급인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에 임명되며 절을 받고(假節)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직하는 등 군부의 최고위급 지위에 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화는 강유의 거듭되는 북벌과 실패를 계속해서 경험하면서 차츰 북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62년에 강유가 또다시 출병하자 이렇게 쓴소리를 할 정도였습니다.
“전쟁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스스로를 불태우게 된다고 하였는데, 백약(伯約. 강유의 字)의 지금 모습이 바로 그러하오. 지략이 상대보다 못하고 힘 또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억지로 밀어붙인다 한들 뜻을 이룰 수 있겠소?”
이때 요화의 나이가 이미 일흔을 훌쩍 넘겼으니 이만저만 노장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이나 전장을 누비며 쌓아온 경험에서 우러난 예견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요화의 말대로 강유는 또다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강유는 이 노장을 여전히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263년에 적이 쳐들어올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 요충지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황호가 무당의 예언을 빌어 반대하자, 이미 암군(暗君)이 된 지 오래인 유선은 강유의 상소를 묵살하고 맙니다. 이듬해인 264년. 정말로 위나라가 쳐들어오자 유선은 뒤늦게 장익과 요화를 출격시켰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후였지요. 결국 촉한은 멸망하고 맙니다. 요화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낙양으로 끌려가던 도중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촉한에 대장이 없으면 요화가 선봉에 선다(蜀中無大將 廖化作先行).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관우나 장비 같은 유명하고도 뛰어난 장수들이 모두 죽고 나니 아쉬운 대로 요화라도 써야 한다는 자조적인 뜻이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이 대신 잇몸이라는 말이나, 호랑이 없는 산에서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속담과도 비슷하겠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요화는 그렇게까지 무시당할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갔는데도 옛 주인을 잊지 않고 끝까지 찾아간 충신이며, 그 와중에도 늙은 어머니를 모셨던 효자입니다. 또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상대의 허점을 노려 승리를 낚아챈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강유의 무리수를 지적하는 식견 또한 있었지요. 일찍이 제갈량도 요화의 그러한 능력을 인정하여 발탁하였습니다.
게다가 경력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합니다. 관우가 형주에 있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거의 오십 년 가량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지요. 촉한의 건국과 멸망을 모두 자신의 눈으로 본 역사의 산증인이며, 팔십 살에 가깝도록 화살비가 쏟아지는 최전선을 누비며 활약한 장수입니다. 그로 인해 촉한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강유, 장익과 함께 마지막까지 촉한을 지킨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고작 요화 따위라고 비웃음을 살 인물은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과거 만인지적으로 일컬어지는 관우와 장비가 활약했던 촉한입니다. 맹장의 상징이라 할 만한 마초와 황충도 있었고, 또 뛰어난 장수인 위연이나 조운 등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선대(先代)의 그런 쟁쟁한 장수들을 보다가 후대의 요화를 보면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요화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최선을 다한 장수였습니다. 관우와 장비처럼 천하를 진동시키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건실하게 활약하면서 나라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어떤 뛰어난 인물이 활약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뒷받침해주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화 역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공로와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당당히 오르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때때로 요화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별 것 아니라고? 그럼 어디 한 번 나만큼 해 봐.”
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