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또다시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 내는 교환학생을 가기 전에 뭘 할까 고민하다 영어캠프에서 TA(Teaching Assistant,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경기도에 위치한 한 대학 캠퍼스에서 한 달 동안 기숙을 하면서 아이들을 케어하고, 아이들과 다양한 영어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함께 일하게 된 TA들도 다 쟁쟁했다. 캠프 규모가 꽤 커서 TA들도 한 10명 가까이 되었는데, 거의 모든 TA가 교포 출신이거나,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영어가 완벽한 친구들이었다. TA와 외국인 선생님은 한 팀이 되어서 한 반을 담당한다. 외국인 선생님이 주로 수업을 맡고 TA들은 수영, 뮤지컬 수업, 운동 액티비티 등 아이들이 영어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짜인 다양한 활동들을 진행하였다.
나는 꽤나 훌륭한 TA였고, 그와 나의 호흡은 찰떡이었다. 그는 내가 맡은 반의 외국인 선생님이었고, 나는 그의 TA였다. 그와 내가 호흡이 좋으니 우리 반 또한 아이들이 정말 수업도 잘 따라오고 활동들도 잘하였다. 그래서 영어캠프 배 올림픽을 해도 1등, 뮤지컬 대회에서도 1등이었다. 수영 액티비티를 할 때는 다른 TA들은 힘들고, 옷 갈아입는 게 귀찮다며 물속에 안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물속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물속에 던져주고 같이 물장구치고 놀았다. 아이들은 나를 정말 좋아했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애정공세를 하고 크면 나와 결혼하겠다는 남자아이도 있었다. 나는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에너지 드링크를 먹으며 내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다 퍼주고 있었다.
캠프가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는 Jonathan이었고, 우리는 모두 그를 Jonny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사 같은 영국 남자와는 달랐다. Jonny는 잘생긴 외모에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장난기가 가득했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넘쳤다. 아이들에게 식사 예절을 알려주고, 특히 몸으로 많이 놀아줬다. 그는 노래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뮤지컬 수업은 외국인 선생님과 TA가 함께 만들어가는 액티비티였다. 우리는 뮤직 비디오를 찍고 무대를 만드는데, 그는 나를 여주인공으로 만들고 아이들이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사랑 노래의 주인공이 된 나는 아이들이 부르는 Bruno Mars의 ‘Just the way you are’가 꼭 그가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Cause you're amazing
Just the way you are
And when you smile
The whole world stops and stares for awhile
Cause girl you're amazing
Just the way you are
- Bruno Mars, Just the way you are 中 -
우리는 같이 춤추고, 연기하고, 사랑 노래를 같이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TA와 선생님 사이였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캠프가 끝나기 일주일 전 주말 밤 TA 선생님 몇몇과 외국인 선생님 몇몇이 모여 치맥을 했다. 여름은 뜨거웠고, 우리는 젊고 에너지가 넘쳤다. 즐거웠고, 재밌는 에피소드는 넘쳐났다. Jonny와 나는 이미 너무 친했고, 서로 잘 챙겨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뜨거운 눈빛을 애써 피했다. 나는 두 달 후면 미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좋은 추억으로만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날은 일요일이라 밤에 한 2시간의 개인 시간이 생겼다. 한 달 동안 기숙사에 갇혀있다 보니, 너무 답답해서 남사친을 불러 드라이빙을 나갔다. 밤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빙을 하니 너무 시원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고 기분전환이 되어서 너무 좋았다. 아이들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일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했는데,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뻥 뚫린 도로를 달라니 그 기분은 꿀맛이었다.
기분이 한껏 업되서 기숙사로 들어오니, 이미 캠프에 TA들과 외국인 선생님들 사이에 내가 드라이빙을 갔다 왔다는 소문이 다 퍼져있었다. 누군가가 내가 남사친의 차를 타고 나가는 걸 본 모양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Jonny는 물었다.
“어제 드라이빙 다녀왔다며? 좋았어?”
일상적인 근황을 묻는 것처럼 하긴 했지만, 그 말에는 질투가 묻어났다.
“응, 좋았지. 스트레스도 풀리고, 좋더라고”
참고로 Jonny는 한국에 5년 이상 살았지만, 한국말을 거의 못했다. 우리는 영어로 대화했고, 나는 그가 그냥 친구처럼 편했다. 그는 그 남사친이 남자 친구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대화 후에 살짝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주말이 지나고 주중에 그와 나는 다시 선생님의 자리로 돌아와, 열심히 수업하고, 아이들의 영어로 대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캠프가 끝나갈 무렵이 되었다. 캠프 마지막 날에 아이들이 준비한 뮤지컬 무대를 하고, 아이들에게 상도 주고, 다양한 엑티 비트를 하였다. 그리고 최고의 TA를 아이들의 투표로 뽑았고,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솔직히 업무 강도도 정말 강하고, 힘들었지만 그 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것 같다 뿌듯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Jonny 때문이었던 것 같다. Jonny가 워낙 아이들을 잘 이끌고, 아이들의 기분을 끌어올리면서도 또 너무 과하지 않게 잡아줬다. 나는 그의 리드에 따라 보조를 맞췄을 뿐인데, 캠프는 성공적이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또 TA로 참여해 줄 수 있냐고 했다. 나는 교환학생을 가기했기에 거절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제이야, 너는 진짜 멋진 사람이야. 너는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그는 가끔은 장난으로, 또 가끔은 진심 같기도 한 칭찬을 나에게 정말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오글거리지만, 나는 그 칭찬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장난으로 화제를 바꾸고, 하하하 하고 웃었다.
캠프는 끝이 보였고, Jonny는 이제 우리는 못 보는 거냐며 계속 물었다. 나는 캠프가 끝나도 아직 미국 가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 밥이나 먹자고 했다. 그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나를 안았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만나자며 서둘러 약속을 정했다. 나는 그 약속을 수락했고, 그렇게 캠프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선생님과 TA 사이가 아니게 되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